충북남부보훈지청, 2월 우리고장 독립운동가 ‘신채호 선생’
이현석 | 기사입력 2018-02-02 12:56:42

[충북타임뉴스=이현석] 충북남부보훈지청(지청장 정병천)은 ‘2월 우리고장 독립운동가’로 신채호 선생을 선정했다.

신채호 선생은 1880년 12월 8일 대전광역시 동구에서 태어나 청주의 고두미 마을에서 서너 살 무렵에 천자문을 배우기 시작하여 신기선의 추천으로 1898년 성균관에 입학하였고 독립협회 활동을 하여 투옥을 당하기도 하는 등 이 무렵부터 애국계몽활동을 시작하였다.

이후 중국으로 망명 후에는 《조선사통론》, 《조선사문화편》, 《사상변천편》, 《강역고》, 《인물고》 등을 집필하였으며, 김규식과 함께 신한청년단을 조직하고 박달학원을 설립하여 한인 청년들의 단결과 교육에 힘썼다.

1907년 4월에 양기탁 안창호(安昌浩) 등을 중심으로 국권회복운동의 비밀 결사로서 신민회(新民會)가 창건되자 이에 가입하여 그 주요회원으로 활동하였다. 신채호는 신민회의 이념과 목표를 그의 논설 속에 충실하게 반영하여 국민을 계몽했으며, 신민회의 대변인과 같은 역할을 수행하였다. 그가 『대한매일신보』에 연재한 「이십세기 신국민(二十世紀 新國民)」은 신민회의 이념을 국민에게 잘 천명한 대표적 논설이었다.

1919년 3 1운동이 일어나자, 북경으로부터 상해로 가서 1919년 4월 10일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수립을 위한 최초의 29인의 모임에 참가하였다. 그러나 이 회의에서 성립된 의정원이 이승만을 국무총리로 추대하자 이승만이 2개월 전에 미국대통령 윌슨에게 한국에 대한 국제연맹의 위임통치를 청원한 사실이 있음을 들어서 이에 반대하고 퇴장하였다.

1923년 1월에 상해에서 국민대표회의(國民代表會議)가 개최되자, 창조파에 가담하여 상해 임시정부를 해체하고 새로운 임시정부의 수립을 주장하였다. 국민대표회의가 실패로 끝나자 크게 실망하여 칩거하면서 국사연구에 종사하였다.

이 시기에 『조선상고문화사(朝鮮上古文化史)』, 『조선사연구초(朝鮮史硏究艸)』에 실린 논문들을 집필하여 근대민족사학을 확립하는데 박차를 가하였다.

 이후 점차 무정부주의 독립운동에 관심을 갖고 1926년 「재중국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在中國朝鮮無政府主義者聯盟)」에 가입했으며, 1927년 9월에는 「무정부주의 동방연맹(無政府主義 東方聯盟)」에 이필현(李弼鉉)과 함께 조선대표로 참석했으며, 1928년 4월에는 그 스스로 무정부주의 동방연맹 북경회의를 개최했다. 

이 회의 결의에 따라 독립운동자금을 염출하려다 일제관헌에 체포되어 10년형의 선고를 받고 복역 중 1936년 여순감옥에서 옥사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광역시 충청북도충청남도경상북도전라북도전라남도
서울타임뉴스인천타임뉴스대전타임뉴스대구타임뉴스광주타임뉴스울산타임뉴스부산타임뉴스제주타임뉴스세종타임뉴스태안타임뉴스안동타임뉴스의성타임뉴스군위타임뉴스영양타임뉴스울진타임뉴스문경타임뉴스상주타임뉴스예천타임뉴스영주타임뉴스청송타임뉴스영덕타임뉴스구미타임뉴스김천타임뉴스칠곡타임뉴스봉화타임뉴스여수타임뉴스광양타임뉴스순천타임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