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종 칼럼]풍기 욱양서원(郁陽書院) 복원은 국가와 정치인의 임무다.
제7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 출마하는 영주시 후보들에게 드리는 제언. 43
김수종 | 기사입력 2018-03-21 10:53:56

김수종 칼럼니스트
[영주타임뉴스=김수종칼럼]선비의 고장으로 알려진 영주에는 이름 있는 학자 가운데 금계(錦溪) 황준량(黃俊良)선생이 계시다. 금계는 평해 황씨 집안으로 퇴계 이황(李滉)선생의 문인이었다. 어려서부터 재주가 뛰어나 신동으로 불렸다.

과거에 급제한 후 1557년에는 단양군수, 1560년 성주목사로 4년간 재임하다 1563년 병으로 낙향하던 중 예천에서 세상을 떠났다. 문집으로 <금계집>이 있으며 욱양서원(郁陽書院)과 백학서원에 제향됐다.

금계에 대한 기억 중에 현재 남아있는 유산은 풍기읍 금계로에 있는 금양정사(錦陽精舍)와 사당인 욱양단소(郁陽壇所), 금선정 정자 정도이다. 금계는 젊은 나이에 대 선배인 신재 주세붕과 도동곡을 둘러싼 경기체가 논쟁을 벌이고, 소수서원이 초시 급제자로 입학 자격을 제한한 방침을 비판하면서도, ‘사문입의를 정해 소수서원의 운영 방안을 마련했다.

아울러 욱양서원을 설립하고, 소수서원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도록 했던 인물이다. 단양군수로 재임 시에는 단양진폐소(丹陽陳弊疏)로 피폐한 단양을 살렸다. 금계는 단양주민들의 하소연을 들은 뒤 ()은 백성을 근본으로 삼아야 하는데 여러 폐단 때문에 우리 백성이 살아갈 수 없으니 어떻게 관아라 할 수 있겠느냐고 탄식하고는 임금에게 올리는 상소문을 썼다.

흉년이 들면 도토리를 주워 모아야 연명할 수 있습니다와 같은 내용으로 처절하고 고단한 백성들의 삶을 보여주고 그 해결을 위한 방책을 제시하였다. 해결 방책을 세 가지로 상책, 중책, 하책의 정책 대안을 제시했다.

상책으로 10년의 기간 동안 모든 부역과 조공의 면제를 제시했고, 중책으로는 단양군을 없애고 원주에 귀속시켜 아직 살아남은 백성들을 다른 고을로 옮기기를 제안했다. 이 두 가지 정책대안이 안 되면 꼭 해야 할 하책을 제시했다.

하책에는 구체적으로 10가지 항목을 들고 있다. 하나하나가 모두 백성들을 고통으로부터 구해줄 수 있는 좋은 방책이었다. 목재, 종이, 산짐승, 약재, 꿀 공납(貢納) 등 열 가지의 폐단을 일일이 나열하며 그것을 없애줄 것을 간곡히 청했다.

당시 명종 임금은 임금을 사랑하고 나라를 걱정하지 않음이 없으니 내가 매우 가상하게 여긴다10년을 한정해 20여 가지 공납과 세금을 특별히 감면했다. 이런 대단한 목민관에 학자였던 금계를 사랑한 스승 퇴계는 금계가 죽자 선생(先生)’이라고 그의 명정(銘旌)에 썼는데, 스승이 제자에게 곧바로 선생이라 일컬은 것은 선비 세계에서 처음 있는 일이었다.

제자의 행장을 쓴 것은 하나의 큰 사건이었다. “, 슬프다 금계여!어찌 생각이나 했을까! 영결하는 말이 부고와 함께 이를 줄을! 실성하여 길게 부르짖으니 물이 쏟아지듯 눈물이 흘렀다네. 하늘이여! 어찌 이리도 빠르게 이 사람을 빼앗아 가시나이까.”라며운명하던 날에 이르러서는 이불과 속옷 등이 구비되지 않아 베를 빌려 염()을 했는데 의류가 관을 채우지 못했다. 그런 뒤에야 사람들이 그의 청빈함이 이와 같아서 거짓으로 꾸며 스스로 세상에 드러내지 않았음을 알았다고 했다.

문사로서 금계가 남긴 한시는 1,000수에 가깝다. 물론 다른 논쟁적인 글도 남겼다. ‘균전의(均田議)’는 그가 경제개혁에도 관심이 지대했음을 보여 주며, 빈부격차를 줄이고 농민이 토지를 지키기 위해서는 반드시 정전제를 실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청혁양종소(請革兩宗疏)’에서는 불교의 폐해를 지적했다. 금계는천민으로서 노역을 싫어하는 무리나 사대부 자손으로서 무식한 자들이 다투어 중이 되는 일을 영예롭게 여기고, 점차 그 흐름을 좇아 마침내 안락만 추구하고 고된 일은 회피하는 지경에 이르렀다모두 유행을 따라 산으로 들어가 나라는 텅 비어가고 있다며 불교로 인한 군사력 결손 문제를 제기했다.

그러면서 문정왕후의 비호 아래 부활된 승과(僧科)를 폐지하라고 주장했다. 또한 금계 학문의 기본은 경세치용(經世致用)이다. 학문과 교육과 행정업무가 상통하여야 한다고 봤다. 선비가 세상에 태어나서 학문을 익히고 경세치용으로 백성들을 위한 유익한 사업을 펼치는 것이 그 본령이라고 보고 실제 자신도 죽을 때까지 실천했다.

학문은 세상에 적용하여 효험이 있어야 하며, 자신을 돌이켜 보며 끝없이 탐구하며 실천을 해야 한다고 했다. 세상에 적용되지 못하고 실제 써먹지 못한 점의 문제를 날카롭게 지적했다. 또한 벼슬살이하며 지켜야 할 거관잠언(居官四箴)’을 정하고 잠언마다 실천 방법과 의의를 4언 절구 8행시로 다짐했다.

거관사잠은 청렴으로 자신을 지키고, 사랑으로 백성을 대하며, 마음은 공익에 두고, 부지런히 일하라는 내용이다. 금계가 세운 욱양서원은 1662(현종3)에 지방유림의 공의로 이황과 황준량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선현 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 오던 중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68(고종5)에 훼철된 뒤 복원하지 못했다. 이후 건물은 한국전쟁 당시에 국군에 의해 작전상 소개(疏開)되었고 1980년대 욱금리에 농업용 저수지가 생기면서 수몰되었다.

놀라운 것은 욱양서원은 인재 선발방식 등에서 소수서원과는 정반대였다는 것이다. 소수서원이 입학 자격을 과거시험에 대비해 초시 급제자로 제한한 데 비해 욱양서원은 인격도야를 더 중시하는 개방형이었다.

당시로는 보기 드물게 교육개혁을 실천한 서원이다. 아쉽게도 지금은 금양정사와 옆에 사당인 욱양단소를 설치하여 봄`가을 제사를 올리고 있을 뿐이다. 오늘날 다시 금계가 세운 욱양서원을 복원해야 하는 이유는 몇 가지 있다.

우선 소수서원과 달리 인격도야를 중시했던 개방형 교육이 이 시대에도 꼭 필요한 방식이다. 그리고 새가 양 날개로 날 듯 소수서원과 함께 풍기를 대표하는 서원이었다는 점이다. 또한 단양진폐소 상소를 작성하여 단양군민을 구하는 등 이 시대에도 공무원의 표상이 될 만한 인물이다.

여기에 거관사잠을 통하여 공무원들의 삶의 방식과 태도를 알려주기도 했다. 여기에 운명하던 날에 이르러서는 이불과 속옷 등이 구비되지 않아 베를 빌려 염을 했는데 의류가 관을 채우지 못했을 정도로 청렴했다는 것은 누구든 배워야할 선비의 덕목이다.

청렴하고 바르고 인격도 훌륭한 선비에 목민관이었던 그는 학교를 세워 과거급제보다는 인격도야를 중시하는 듯 학문하는 자의 기본을 잘 보여주었다. 마지막으로 욱양서원은 전시에 아군이 작전상 불태운 것이다.

따라서 작전상 불가피했다고 해도 전쟁 후에 정부가 보상하는 것이 맞다. 지금이라도 보상차원에서 정부가 복원을 주도해야 하며, 하루라도 빨리 금양정사 인근에 복원하여 다시 강학(講學)이 꽃피는 서원으로 자리 잡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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