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 병산서원에서 서애 선생을 만나다
김수종 작가 안동여행기, 2
김수종 | 기사입력 2018-06-09 12:20:53

[안동타임뉴스=김수종] 나도 100%동의 한다. 그래서 나는 화산 아래에 있는 병산서원(屛山書院)을 좋아한다. 3년 전에 아내와 함께 안동에 왔다가 이곳에 다녀왔다. 비포장도로를 달려는 재미도 있고, 서원 앞을 흐르는 강줄기도 좋다. 병산서원은 본래 이 서원의 전신은 풍산현에 있던 풍악서당으로 고려 때부터 사림의 교육기관이었다.

선조5년에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 선생이 지금의 병산으로 옮긴 것이다. 병산서원은 류성룡 선생을 위한 서원이라고 보면 된다. 1620년에 유림의 공론에 따라 퇴계 선생을 모시는 여강서원으로 위패를 옮기게 되었다. 그 뒤 1629년에 별도의 위패를 마련하여 존덕사에 모셨으며, 그의 셋째 아들 수암(修巖) 류진(柳袗)을 추가 배향하였다.

1863(철종14)에 사액되어 서원으로 승격하였다. 1868(고종5) 서원철폐령이 내렸을 때에도 훼철되지 않고 보호되었다. 사적 260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서애 선생의 문집을 비롯하여 각종 문헌 1,000여 종 3,000여 책이 소장되어 있다. 서애 선생은 일찍부터 퇴계 선생의 문인으로 들어가 근사록을 전수받았다.

1564(명종19) 사마시를 거쳐, 1566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권지부정자가 되었다. 이후 교리·응교 등을 거쳐 1579년 직제학, 이듬해 부제학을 지내고 상주목사를 자원하여 향리의 노모를 봉양하였다. 이어 대사간·도승지·대사헌을 거쳐, 경상도 관찰사로 나갔다. 1584년 예조판서로 경연춘추관동지사를 겸직하였고, 1588년 선비의 꿈인 대제학이 되었다.

1590년 우의정에 승진, 광국공신 3등으로 풍원부원군(豊原府院君)에 봉해졌다. 이듬해 좌의정에 승진하여 이조판서를 겸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도체찰사로 군무를 총괄, 이순신·권율 등을 등용하였다. 이어 영의정이 되어 왕을 호종하여 평양에 이르렀는데, 나라를 그르쳤다는 반대파의 탄핵을 받고 면직되었으나 의주에 이르러 평안도 도체찰사가 되었다.

이듬해 중국 명나라 장수 이여송과 함께 평양을 수복하고 그 후 충청·경상·전라 3도 도체찰사가 되어 파주까지 진격, 이 해에 다시 영의정이 되어 4도 도체찰사를 겸하여 군사를 총지휘하였다. 화기 제조, 성곽 수축 등 군비 확충에 노력하는 한편, 군대양성을 역설하여 1594년 훈련도감이 설치되자 제조가 되어 기효신서를 강해하였다.

1598년 명나라 정응태가 조선이 일본과 연합, 명나라를 공격하려 한다고 본국에 무고한 사건이 일어나자, 이 사건의 진상을 변명하러 가지 않는다는 북인의 탄핵을 받아 관직을 삭탈당했다. 1600년에 복관되었으나, 다시 벼슬을 하지 않고 은거했다. 서애 선생은 도학·문장·덕행·글씨로 이름을 떨쳤고, 특히 영남 유생들의 추앙을 받았다.

저서로는 임진왜란사 연구에 있어서 빼놓을 수 없는 귀중한 사료인 <서애집><징비록>등이 있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이번에도 나는 만대루를 보고 왔다. 만대루는 건축과 조형미에서 그 가치를 인정받고 있는 곳이다. 자연지형을 그대로 이용하여 지은 정면 7, 측면 2칸의 누각으로 휴식과 강학의 복합공간이다.

팔작 기와집에 홑처마로 된 이 웅장한 건물은 인공적인 서원건축과 자연사이의 매개체 역할을 하는데 한국 서원건축의 백미로 꼽힌다. 기둥사이로 보이는 낙동강과 병산은 마치 7폭 병풍을 보는 듯한 아름다운 경관을 연출한다.

만대는 당나라 시인 두보의 시 백제성루(白帝城樓)’의 한 구절인 취병의만대 백곡회심유(翠屛宜晩對 白谷會深遊)’에서 따온 말이다. ‘푸른 병풍처럼 둘러쳐진 산수는 늦을 녘 마주 대할만 하고, 흰 바위 골짜기는 여럿 모여 그윽히 즐기기 좋구나

잠시 앉아 쉬면서 만대루 주변과 서원을 둘러보고는 나왔다. 정말 행복한 시간이었다. 이제 식사를 위해 안동 구시장으로 이동하여 안동찜닭으로 저녁을 했다. 지방선거철이라 온통 선거방송과 유세로 시내가 시끄럽다. 우리가 식사를 한 식당에도 현직 국회의원과 시장후보 등이 몰려와 식사하고 있었다. 세상은 시끄럽지만 우리는 갈 길을 간다.

식사를 마치고는 시장 구경을 했다. 재래시장은 언제나 볼 것이 많다. 나는 속옷을 가지고 오지 않아 시장에 온 김에 필요한 속옷을 몇 장 샀다. 이제 장까지 봤으니, 숙소가 있는 북쪽 봉정사 인근에 있는 서후면 태장리 안동김씨 태장재사(安東金氏 台庄齋舍)’로 갔다.

이곳은 경상북도 민속자료 제26호로 소위 신안동김씨 시조인 태사 김선평(金宣平)의 단소를 지키고 봉향을 위해 건립한 재사(齋舍). 1711(숙종 37)경 작은 집을 지었다가 1749(영조 25)에 확장하였는데, 식수난과 질병이 겹쳐 사헌부 지평 김양근이 경향각처의 뜻을 모아 현 위치에 승려의 집을 철거하고 터를 닦아 1793(정조 17)28칸을 중건하고 익실과 문루를 옮겨지었다.

1913년 주사를 현 위치에 확장하여 10칸을 중건했고 1960년 풍수해를 당해 재사를 보수했다. 재사는 자형의 이상루(履霜樓)자형의 재사, 자형의 관리사로 구성되어 전체적으로는 튼 자형의 배치형태를 취하고 있다. 재사는 제수를 준비하는 유사실과 전사청, 참제원실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상루는 묘제 뒤에 음복과 문중회의를 여는 장소로 사용된다.

이상루는 규모가 크고 멋진 누각이라 영화나 드라마 촬영장으로 자주 쓰이고 있다고 한다. 재사는 민도리집의 간결하고 검소한 건물이나, 누는 이익공의 팔작지붕 건물로 누상부에는 3면에 판벽을 치고 판문을 설치하였다. 태장재사는 안동지역의 제사 가운데서 규모가 크고 각 부분이 용도에 따라 명확히 구분되어 있는 건물로 매년 음력 1010일에 묘제를 지낸다.

아무튼 이런 곳에 잠을 청하게 되어 기쁘다. 외부에 있는 화장실과 세면장을 오가는 번거로움을 제외하곤 크게 불편함은 없었다. 방충망까지 있어 드나들 때 조심만 하면 모기나 벌레에도 크게 피해가 없고, 깨끗하게 관리된 시설과 이부자리도 나름 좋았다. 친구들과 술과 차 한 잔을 하고는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내일 아침은 이곳에서 멋진 안동음식을 먹을 수 있을 것 같다.

3() 아침이 밝았다. 한옥에서 맞이한 투명한 아침햇살이 마음에 든다. 세수를 하고는 반찬이 30개나 되는 아침상을 받았다. 행복하게 식사를 마쳤다. 다시 건강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는 정갈한 반찬과 밥이다. 식사를 끝내고는 재사(齋舍)의 안팎을 살펴보고는 이웃한 봉정사(鳳停寺)’로 향한다.

봉정사는 최근 사찰의 규모가 작다는 이유로 유네스코세계문화유산에 등록되지 않았지만, 사실은 멋진 절이다. 국화차가 유명하고, 1989년 배용균 감독 작품인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이라는 영화 촬영지로 잘 알려진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