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를 외면하지 않았던 청년 허태정, 대전시장 되다!
허태정 대전시장이 걸어온 길!
홍대인 | 기사입력 2018-07-09 18:19:10
◆예산 산골마을의 골목대장 소년 태정

허태정 대전시장은 1965년 8월 충남 예산의 조그마한 시골마을에서 6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허태정 시장이 태어난 대술면 송석리는 허 시장이 초등학교 6학년 때가 돼서야 전기가 들어올 정도로 산 깊은 곳으로, 양천 허 씨가 300년 넘게 살아온 뿌리 깊은 집성촌이다.

어린 시절의 소년 태정은 쾌활하고 덩치도 큰 편이어서 늘 골목대장을 했다. 운동을 좋아해 초등학교 시절엔 핸드볼 선수로 뛸 정도였다.

태정이 기억하는 어린 시절 좋은 기억 중 하나는 ‘나눔’이었다. 어머니께서는 밥을 지으실 때마다 쌀을 한 움큼씩 덜어 단지에 모으셨고, 단지가 차면 어려운 이웃에 나눠주곤 하셨다.

아버지는 육남매를 모두 대학까지 보낼 정도로 교육열이 높으셨다. 소년 태정도 중학교를 마치자 도시로 유학을 보내셨다. 그러나 태정은 공부보다는 여행에 더 관심이 많았다.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1~2권에 나온 3분의 2를 다녀왔을 정도다.

“고등학교 시절, 치열한 고민과 그것을 해결하고 싶었던 욕구로 집어든 수많은 책과 여행, 그리고 문화예술로부터 얻어낸 경험이나 지식은 성인이 돼서도 생각을 견고하게 다듬는 힘이 됐다. 그래서 지금도 두 아들은 물론 청소년들에게 ‘학교 공부에만 매달리기보다 여행과 독서·문화 활동을 통해 자신의 폭을 키우는 일에 게을리 하지 말라’고 얘기한다"-허태정 시장이 지난 2013년 펴낸 <행복유성 디자인> 중에서

◆민주화운동의 현장에서

허태정 시장이 충남대 철학과에 입학했던 1985년은 군사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군부의 장기 독재를 노리던 암울한 시기였다.

대학가는 민주화를 요구하는 학생들의 외침으로 들끓었다. 자연스럽게 학생운동을 접하게 된 청년 태정은 1987년 6월 민주화운동을 거치면서 어느새 운동권의 중심에 서 있었다.

대학 4학년에 올라가던 해인 1988년 2월에는 1년 가까이 수배를 받는 고초를 겪기도 했다. 그리고 그해 말에는 전두환 노태우 구속을 촉구하며 대전검찰청을 점거, 대전교도소에 수감됐다.

◆현실정치로 이끌었던 버너 공장

1990년대 시민운동이 활발하던 시절, 당선자는 충남민주운동청년연합 간사를 맡으면서 본격적인 시민운동에 들어갔다.

그 당시는 대기업 중심의 성장 전략을 국가 정책기조로 유지하던 때라 노동자들에 대한 처우와 환경은 열악했다.

허 시장은 노동환경 개선에 힘을 보태고, 노동자의 인식을 일깨우고자 지금의 대화공단에 있는 휴대용 버너 생산 공장에 들어갔다. 그곳의 노동환경은 밖에서 바라봤던 것보다 훨씬 심각했다. 허 시장은 본격적인 현실정치에 관심을 갖게 된다.

부인 양창희씨와는 운명적으로 만났다

◆1988년 운명처럼 만난 아내

지금의 아내 양창희 씨는 수배를 받으며 몸을 피하던 시절, 운명처럼 만났다.

1988년 2월 조직사건으로 수배를 받던 중학교로 경찰이 밀고 들어온다는 급박한 상황을 전달받고 피한 곳이 대학방송국. 고가의 장비가 있는데다 이중 철제문이 돼 있어 경찰도 함부로 침입할 수 없는 곳이었다.

급하게 들어간 방송국의 문을 걸어 잠갔는데 그 안에 한 여학생이 있었다. 아내는 8년간의 연애를 하는 동안 수배가 떨어져 기약 없는 도피생활을 전전하는 사회 활동가 남자친구 곁을 흔한 투정 한번 없이 지켜주었다.

◆2002년 노무현·문재인을 만나다

사회에 대한 잘못과 편견을 고쳐보자는 의지와 열망은 허태정을 현실정치에 한 걸음 더 다가가게 했고, 30대 후반이었던 2002년 정치인 노무현을 만나게 했다.

당시 ‘반칙과 억지’가 ‘원칙과 정직’을 유린하던 사회에서 돈도 조직도 없는 인간 노무현은 지역통합과 민주권력을 위해 한길을 걸어온 바보 같은 정치인이었다.

허태정은 그 모습에서 희망과 미래를 봤고, 선거캠프에 뛰어들게 된다. 그리고 노무현 참여정부가 출범한 2003년, 38살이 되던 그해 대통령비서실 행정관에 임명됐다. 그 무렵 문재인 대통령을 만났다.

허태정 시장은 “당시 문재인 비서실장을 만나면서 인사의 공정성과 약자에 대한 배려라는 원칙을 배웠다. 노무현·문재인과 함께 하며 국민들의 생각과 소중한 의견을 무서워 할 줄 아는 자세를 알게 된 것 같다"고 말했다.

이후 인사수석실 균형인사비서관실로 자리를 옮기면서 국가 조직에 대한 안목과 시야를 넓힐 수 있었고 2004년엔 청와대를 나와 과학기술부로 자리를 옮겨 오명 부총리 겸 과기부장관의 정책보좌관으로 일했다. 2006년에는 제2의 고향인 대전에 내려와 유성구에 위치한 대덕특구복지센터소장으로 일하며 유성과의 인연을 이어나갔다.

◆2010년, 변화의 열망은 컸다

2008년 새로운 정부가 출범했다. 국민의 염원과 달리 분배보다는 성장을, 토론과 협의보다는 일방적인 지시가 우선시됐다.

국가균형발전과 수도권 규제는 경제적 효율을 내세운 실용 앞에서 무너졌다. 1987년 민주화운동을 탄생한 민주주의, 지방분권, 그리고 지방자치라는 이념적 가치가 허물어지고 있었다. 어떻게 해야 할까? 무엇을 해야 할까?

대전지역은 2008년 자유선진당이 6개 지역구 중 5개 지역에서 국회의원을 당선시키는 바람을 일으켰고, 2010년 지방선거 역시 지역정당인 자유선진당 우세가 점쳐지는 상황이었다.

더구나 유성은 당시 구청장이 비록 당적은 한나라당이었지만, 보궐선거로 당선된 뒤 재선에 성공한 터라 조직력이 탄탄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모두들 허태정의 도전을 무모한 도전이라고 했다.

조직력이 좋은 구청장과 정당의 바람을 등에 업은 자유선진당 후보, 이 둘을 넘어야 하는 상황에서 2010년 6월 2일 유성구민은 거의 신인이나 다름없었던 허태정의 손을 들어줬다. 그만큼 변화를 원하는 유권자들의 열망은 컸다.

◆2018년 대전시민, 새로운 역사를 선택하다

허태정 시장은 올해 초 “시민과 함께 새로운 대전시대를 열겠다"며 대전시장 출마를 선언했다.

허 시장은 “산업화 시대의 속도와 효율로 도시발전을 이끌던 낡은 리더십을 끝내야 한다. 소통하고 포용하는 리더십, 개인의 삶을 들여다보는 섬세한 리더십, 어머니 같은 스마일 리더십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허 시장은 또 “시민사회가 시정의 모든 분야에 참여할 수 있도록 분야별 거버넌스를 구축해 자치분권을 선도하는 전국적 모델도시로 만들겠다. 시민과의 소통으로 생활에 밀접한 정책을 만들어 대전을 보다 스마트하게 만들겠다"고 밝혔다.

지난 6·13 지방선거에서 압도적인 표차로 당선된 허태정 시장은 당선소감을 통해 “대전에서는 동서격차가 완화되고 나이와 성별, 계층, 인종과 무관하게 기본권이 보장되는 삶이 시작될 것이다. 교육과 주거, 문화 향유의 기회가 시민 모두에게 고르게 주어지는 균형 잡힌 사회로 나가게 될 것"이라며 새로운 대전시대를 예고했다.

허태정 대전시장이 이끌 민선 7기 대전 시정. 우리는 원칙과 상식이 통하는 새로운 역사를 대전 시민들과 함께 만들어 나갈 준비를 하고 있다.

<본문의 원고는 it’s Daejeon 2018, 07호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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