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시의회 구미경 의원
행복한 사람은 좋은 환경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 좋은 태도를 가진 사람이다. 물론 환경이 사람을 만든다는 말도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 좋은 환경이라는 기준이 모호한 사람이 있어 이 또한 문제가 되기도 한다.

특수학교, 대안학교 등 장애인 시설이 신설되려 하면 영락없이 주민들의 민원이 빗발친다. 결국 집행부는 번번히 손을 놓고 만다. 사회적 약자를 보듬어야 할 개개인이 집값이 떨어진다는 근거없는 소문에 현혹되어 벌이는 행태이다.

참으로 통탄할 일 아닌가. 좋은 환경이란 물질적인 것 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것까지 포함된다. 멋대로 장애인이 옆에 있으면 환경의 질이 떨어진다고 판단하면서, 정작 본인들이 장애인들 환경의 질을 떨어트리고 있다는 것은 왜 생각하지 못하는 것일까. 사회적 약자를 배려하지는 못할망정 배척하려는 시민들 사이에서 장애인들이 얼마만큼의 고통을 받고 있을지, 생각해 본적은 있을까.

미국의 육상선수이자 배우, 모델인 에이미 멀린스는 종아리뼈가 없이 태어나 1세 때 두 다리를 절단하고 의족으로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그녀는 역경을 딛고 육상선수가 되었으며, 명랑하고, 자신감이 넘치고, 아름답다.

그녀는 장애를 가진 사람들에게 말한다. 역경을 부정하고 피하고 숨기는 데에 공을 들이기보다 그 안에 감춰진 기회를 찾는데 공을 들이라고. 하지만 과연 에이미 멀린스가 이, 대한민국의 대전에서 출생했다고 가정했을 때 과연 이러한 마음가짐을 지닐 수 있었을까.

에이미 멀린스는 또한 이렇게 말했다. 진짜 장애는 억눌린 마음이라고, 억눌려서 아무런 희망도 없는 마음이라고. 이 억눌린 마음을 갖게 하는 것은 결국 주변 환경일 수밖에 없다.

주위사람들이 장애를 가진 사람에게 용기와 희망을 주고, 자그마한 성공에도 축복해주고 자랑스러워 할 때. 장애인들은 역경을 딛고 일어설 용기를 가지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 우리 주위는 어떠한가. 창피해하고, 숨기고, 조금만 도우면 충분히 거동을 하고 사회생활을 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너는 안돼. 라며 못을 박는다.

에이미 멀린스처럼 역경을 딛는 데는 본인의 강한 의지도 중요하지만, 그만큼 그 의지에 부합하는 주변사람들의 태도 또한 중요하다. 오죽하면 우리나라에는 병신이 육갑한다는 소리까지 있겠는가.

사람들은 성공한 장애인에게 찬사를 보낸다. 하지만 그 장애인이 그렇게 성공하기까지, 비아냥과 질타를 받았을지 혹은 격려를 받았을 지에 대해서는 생각해보지 않는다. 즉, 과정을 너무나 간과한다. 나 자신은 과연, 주변 장애인의 희망을 억누르고 있는 것인가 독려해주고 있는 것인가에 대해 한번쯤은 생각해 보아야 하지 않을까.

15년 전 뉴질랜드에 잠깐 갔을 때 동네 주민이 중증 장애아를 출산하면 주위에서 서로 내 자식처럼 같이 돌보아 준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실제로 그 시기에 버스를 탔는데 이미 모든 버스는 저상버스였고, 나이 지긋하신 할머니를 버스정거장이 아닌 집 앞에서 하차해드리는 모습을 보았다.

그뿐만이 아니라 중증 장애아를 입양하여 훌륭히 키우는 부모들도 있었다. 그토록 달랐다. 선진국이라는 것은 이러한 모습이구나. 그리고 희망을 품었었다. 우리나라도 이제 선진국 대열에 합류했다는데, 조금 더 기다리면 바뀌지 않을까, 하고. 그리고 15년이 지난 지금 나는 새삼 주위를 둘러보고 한숨을 짓는다. 제도는 조금 더 개선이 되었고 시설 또한 증설되고 있지만 아직도 시민의식은 제자리걸음인 것만 같아 보인다.

장애인 정책은 장애인의 입장에서 세워야 한다. 특수학교의 학생 수는 늘어나는데 학교는 부족하고, 특수학교를 졸업한다고 해도 직장을 가질 수 있는 장애인들은 얼마 되지 않는다. 특수학교를 늘리되 이제 장애인들의 직업전문학교도 많이 필요한 것이다. 이렇듯 주민들이 나서서 장애인들을 위한 시설이 신설되는 것을 막는다면 장애인들은 영영 기회를 잃게 된다.

이 사회는 혼자 살 수 없는 사회다. 성숙한 사회란 사회적 약자를 배려해주고 타인의 아픔을 같이 공유하며, 위로해주고, 기쁨과 슬픔을 나누는 사회가 아니던가. 그런 사회가 진정한 복지국가라 할 수 있다.

장애인의 한 사람으로써, 장애인 시설을 반대하는 주민들의 사회적 지능이 모자람에 한탄을 금할 수가 없다. 이타적인 삶이 쉽지 않은 것을 나도 안다.

혹자는 이기적인 것이 현명한 것이고 이타적인 것은 바보 같다고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 전체를 생각해 보았을 때. 우리는 과연 지금 공생의 길을 걷고 있는 것인가 공멸의 길을 걷고 있는 것인가 한번쯤 생각해봐야 한다.

자신의 부모, 자신의 아이라고 치환하여 생각한다면 과연 그럴 수 있는지. 입증되지도 않은, 허황된 소문만을 토대로 한 자신의 조그마한 이익을 희생하기 싫어 사회적 약자의 희망을 뭉개버리고 용기를 짓밟고 있지는 않은지. 한번쯤은 생각해 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2015-04-13 20:36:54
[칼럼] 구미경 대전시의회 의원, “장애인 시설, 주민들은 왜 반대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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