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북북부보훈지청, 1월의 독립운동가 유관순 열사
조국 독립을 위해 꽃다운 청춘과 목숨을 바친 독립운동가
홍대인 | 기사입력 2019-01-04 09:40:09

[충북타임뉴스=홍대인 기자] 충북북부보훈지청(지청장 우진수)은 국가보훈처가 선정한 2019년 1월의 독립운동가 유관순 열사를 지역민들에게 알리고자 한다고 4일 밝혔다.

선생은 1902년 충남 목천군 이동면 지령리 (현재 천안시 병천면 용두리)에서 아버지 유중권과 어머니 이소제사이의 5남매 중 둘째 딸로 태어났다.

선생은 1918년 4월 이화학당의 고등과 1학년에 진학하였고, 1919년 3월 1일 일제하 최대의 항일 민족독립운동인 3·1운동에 뛰어들었다. 이같이 선생과 같은 학생들이 3·1운동에 대거 참여하여 조선총독부가 임시휴교령을 반포하자 선생은 3월 13일 사촌 언니인 유예도와 함께 독립선언서를 몰래 숨겨 가지고 귀향하여 본격적으로 고향에서의 만세 시위운동을 추진하여 갔다.

우선 선생은 지역민들에게 서울의 3·1운동 소식을 전하고, 만세 시위운동의 필요성을 설득하였다. 그리하여 4월 1일 아우내 장날 정오에 만세 시위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정하고, 만반의 준비를 갖추었다. 거사를 앞둔 3월 31일 선생은 장터 어귀에서 밤새 만든 태극기를 나누어 주면서 만세 시위운동에 참여하러 모여드는 사람들에게 용기를 북돋아 주었다.

거사 당일 선생을 필두로 3천여 명의 군중들이 ‘대한독립’이라고 쓴 큰 기를 앞세우고 태극기를 흔들며 아우내 장터 곳곳을 누비자 천안 일본군 헌병분대원들과 수비대원들은 총검으로 시위 운동자들을 학살하여 이날 19명의 사망자와 30명의 부상자가 발생하였다. 이때 선생의 아버지 유중권이 "왜 사람을 함부로 죽이느냐"고 항의하다가 일본 헌병의 총검에 찔려 순국하였고, 이를 보고 남편의 원수를 갚으려고 달려들던 선생의 모친마저도 일본 헌병들에게 학살당하고 말았다. 이날 선생은 체포되어 천안헌병대로 압송 당하였다.

선생은 천안 헌병대에서 갖은 고문을 받으면서도 처음부터 끝까지 자신이 시위 주동자라고 말하면서 죄 없는 다른 사람들을 석방하라고 호통을 쳤다. 이후 공주감옥으로 이송될 때에는 군중들이 많이 모여 있는 곳을 지날 때마다 독립만세를 연이어 고창하여 불굴의 독립 의지를 표출하기도 하였다.

공주지방법원에서 진행된 재판과정 중 선생은 법정에서, "나는 한국 사람이다. 너희들은 우리 땅에 와서 우리 동포들을 수없이 죽이고 나의 아버지와 어머니를 죽였으니 죄를 지은 자는 바로 너희들이다. 우리들은 너희들에게 형벌을 줄 권리는 있어도 너희들은 우리를 재판할 그 어떤 권리도 명분도 없다."고 하면서 일제의 재판을 거부하는 당당함과 민족적 기개를 잃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선생은 5월 31일 공주지방법원에서 징역 7년을 선고받고 경성복심법원에 공소하였다. 이에 따라 공주감옥에서 서대문감옥으로 이감된 선생은 여기에서도 아침 저녁으로 독립만세를 고창함으로써 수감자들의 항일 독립의지를 고취하여 갔다.

이후에도 선생은 서대문 감옥에서의 온갖 탄압과 고문에도 굴하지 않고 지속적으로 옥중 만세를 불렀다. 특히 1920년 3월 1일 3·1운동 1주년을 맞이해서는 수감 중인 동지들과 함께 대대적인 옥중 만세운동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이로 인해 선생은 지하 감방에 감금되어 야만적이고 무자비한 고문을 당하게 되었다. 선생은 고문으로 인해 방광이 터지는 중상을 입었으나 치료하지 못한 채 고문의 후유증과 영양실조로 1920년 9월 28일 오전 8시경, 서대문감옥에서 18살의 꽃다운 나이로 순국하고 말았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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