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교 문선명 오른팔···박보희 별세.향년 90세
박정희 전대통령의 획기적 외교 전환점/ 외교성공의 비화,박보희와 박동선의 코리아게이트 재조명[1]
서승만 | 기사입력 2019-01-14 09:12:33

통일교의 문선명 오른팔이었고 김일성을 조문하기도 했던 박보희 전세계보사장이 12일 향년90세 숙환으로 별세했다.

'통일교 2인자’로도 불리었던 통일교 문선명 총재와 사돈 관계인 고 박보희씨는'문선명 총재의 오른팔'로 불리었다.

육사 출신인 고인은 영어 실력이 뛰어났다.

1970년대 통일교가 미국을 비롯한 해외에서 교세를 넓혀가던 시기에 문선명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통일교) 총재의 연설을 영어로 통역하며 ‘문선명의 오른팔’이 됐다.

문 총재의 차남이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나자, 박 전 사장은 자신의 딸 박훈숙과 영혼결혼식을 맺게 했다. 이후 박 전 사장은 문 총재와 사돈이 됐으며, 딸은 성씨를 바꿔 문훈숙(현 유니버설발레단 단장)이란 이름으로 활동하고 있다. 1930년 충남 아산 출생인 고인은 육사 2기 생도로 한국전쟁에 참전했다.

이후 주미 한국대사관 무관보좌관을 비롯해 선화학원 이사장, 미국 뉴욕시티트리뷴 발행인, 워싱턴타임스 회장 등을 역임했다. 1991년부터 3년간 세계일보 사장을 맡았다.

고인은 대북 관계에 있어서도 통일교 차원의 물꼬를 튼 장본인이기도 하다. 1994년 북한 김일성 주석이 사망했을 때 직접 방북해 조문한 일화는 유명하다.

당시 남한에서는 정부 차원이든, 민간 차원이든 북한에 조문을 가지 않았다. 통일교 관계자는 “당시 국정원과 이야기가 다 된 상태에서 갔는데, 보수적인 언론에서 ‘박보희씨 방북’을 하도 비판적으로 보도하니까 정부가 귀국을 막았다”고 배경을 설명했다.

결국 고인은 한국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중국을 거쳐 미국으로 가서 활동했다. 김영삼 정부 말기 때가 돼서야 비로소 한국으로 돌아왔다. 고인이 1994년 북한을 방문해 김정일 위원장을 만났던 사진을 기자회견장에서 보여주고 있다.

그동안 통일교는 북한에 평화자동차를 설립하는 등 각별한 대북관계를 구축했다.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위원장의 남북정상회담이 성사될 때도 통일교측의 대북 네트워크가 적지 않게 기여한 것으로 알려졌다.

김일성 주석이 사망할 때 김정일 위원장에게 “남쪽과의 관계는 문 총재와 상의하라”는 유훈을 남겼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만큼 통일교가 대북 관계에서 쌓아놓은 신뢰도가 있다.

박보희와 박동선게이트

1976년 미국 워싱턴포스트의 보도로 불거진 ‘코리아게이트’(박동선 사건)에 연루돼 고인이 미 하원에 출석해 증언하기도 했다.

당시 중앙정보부가 재미사업가 박동선을 통해 미국 정치인에게 로비 활동을 하다가 터진 사건이 코리아게이트다. 고인은 코리아게이트를 조사하는 미 하원 국제관계위원회 산하 국제기구소위원회에 증인으로 소환됐다.

당시 스파이 혐의를 받던 고인은 위원장을 맡고 있던 도널드 프레이저에게 오히려 애국심을 자극하며 공격적 발언을 퍼붓기도 했었다. 결국 어떠한 스파이 혐의도 밝혀지지 않았다.

고인은 저서 『나는 자랑스러운 한국인』에 당시 일화를 세세하게 기록해 놓았다.

고인이 1994년 통일교 문선명ㆍ한학자 총재와 함께 북한에 들어가기 전 중국 베이징공항에서 기념촬영을 했다.

고인은 지난해 건강이 악화돼 경기도 가평에 있는 통일교 산하의 청심국제병원에 줄곧 입원해 있었다. 고인의 유족으로는 문훈숙 유니버설발레단장을 비롯해 2남이 있다.

박동선 게이트

미국은 워싱턴, 그 중에서도 국회 의사당은 단연 세계 제1의 중심지다. 그곳은 오늘도 미국내 각 이익 단체들은 물론 세계 각국의 이해 관계를 대변하기 위해 활약하는 로비스트들로 붐비고 있다.

국회 의사당 본관 1층에 방 하나가 있다. 이름하여 법사위원회 회의실이다. 이곳은 40년도 훨씬 지난 오래전 한국과 미국 두 나라 국민들의 관심을 한곳에 모았던 역사의 현장이기도다.

바로 이곳에서 1년 반 동안의 줄다리기 끝에 한국 정부의 불법 로비와 미국 국회의원들의 부패를 입증하기 위한 청문회가 열렸고 그것으로 사건은 종결됐지만 무려 2년 간이나 한미 양국간의 현안으로 등장해 전 세계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희대의 로비사건 코리아 게이트였다.그것은 한미사에서 최악의 순간이자 최대의 중요한 획기적 전환점이 됐던 역사적 사건이었다.

박정희 전대통령의 강대국 미국을 상대로한 외교적 승리이기도 했다.

우리가 약소국으로서의 강대국 미국을 상대로 국익을 위해 열악한 국가의 상황을 반전시킬 수 있는 기회가 되기도 했던것이다.

코리아 게이트가 처음 드러난 것은 1976년 10월 24일 워싱턴포스트의 특종 기사 때문이었는데 이후 미국내 각 신문들이 터뜨린 코리아 게이트의 내용은 무려 90여명에 달하는 상하원 의원들이 한국인 박동선으로부터 도합 수백만 달러의 뇌물을 받고 한국에 유리한 의사 결정을 해 줬다는 것이 사건의 간단한 내막이지만 그 과정과 결과에 있어서는 엄청난 파장과 영향력을 파생 확대시킬 수 있는 게기가 되었던 것이다.

그당시 미의회의 거명된 의원들 중에는 하원의 리처드 해너 캘리포니아 의원을 비롯해 세출 위원장인 루이지애나 주 하원의원 오토 패스만, 그리고 하원의장 필 오닐도 포함되어 있었다.

당시 많은 의원들은 부패해 있었고 그들이 매수 되었다는 것이 언론에 알려지면서 본격적인 수사가 시작되었다. 여러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이 사건은 언론이 본격적인 수사의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이었다는 것이 새삼 다시 확인된 사건이었다.

더군다나 흥미를 끈 것은 의원들에게 수백만 달러의 뇌물을 준 장본인이 수수께끼의 한국인 실업가라는데 있었다. 박동선, 그는 코리아 게이트가 터지기 수 개월 전부터 미국 언론에 사교계에 이름이 오르내리던 워싱턴 사교계의 유명 인사였다.

당시 미국인들은 30대 중반이었던 박동선이 느닷없이 나타나 사교계를 주름잡던 노란 피부의 청년을 의혹의 눈길로 주목하고 있었다.

박동선은 한때 한국 10대 재벌 그룹에 속했던 미륭상사의 막내 아들이었다. 52년 고교시절에 미국으로 건너 가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에 미국의 명문 사립대학인 조지타운 대학에 진학했고 한국인으로는 물론 동양인으로는 처음으로 조지타운 국제관계대학 학생회장이 됐던 인물이다.

미국과 중남미 명문가의 자제들이 많이 다녔던 조지타운 대학의 학생회장. 그는 천부적인 사교술과 세련된 매너로 어려서부터의 꿈을 이루어가고 있었다. 조지타운 대학을 졸업한 지 3년 후인 1962년 그는 워싱턴에서 조지타운 클럽이라는 사교 클럽을 창설하면서 다시한번 주목을 받는다.

1700년 대에 건립된 2층 목조 건물을 구입해 거물급 정치인들과 변호사들과 사교장을 만든 것이었다. 고가의 미술품들과 한국적 장식품들로 치장된 품위있는 공간에 최고의 음식과 최고급 와인이 제공되는 화려한 파티였다.

조지 타운 클럽과 박동선은 단박에 워싱턴 사교 클럽의 총아로 떠오르게 된다. 존슨 전 대통령을 비롯해 오닐 하원의장, 부통령 시절의 제럴드 포드, 험프리 상원의원 등 거물급 정치인들과 금발 미녀가 참석하는 박동선의 파티였다.

조지 타운 클럽은 그 자체가 또다른 정치의 장이었다. 70년대 초중반 워싱턴에 거주하는 명사들의 주소록격인 그린북에는 박동선의 이름이 빠지지 않고 올라 있다. 그러나 코리아 게이트로 미 전역이 떠들썩해지고 백악관과 국무성의 일일 브리핑에 한국 관련 스캔들이 단골 메뉴로 등장할 무렵 스캔들의 박동선은 이미 미국을 떠나 있었다.

1976년 10월 코리아 게이트가 터지기 직전까지 한국에서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외무부에서 이상한 것을 눈치챈 것은 사건이 나기 직전인 76년 9월이었다. 도쿄에서 신문으로 소식을 접한 박동선은 즉각 서울로 와서 정부측과 협의를 한 뒤 다시 동경을 거쳐 런던에서 10개월간 칩거 생활을 한다.

서울에서 코리아 게이트에 대한 공식 입장을 밝힌 것은 사건이 난 지 두 달후인 76년 12월 28일 이었다. 김상근(金相根) 망명 사건과 청와대 도청설로 한창 시끄러운 때에 정부의 발표요지는 박동선과 한국정부는 무관하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그당시 정부의 기묘한 대미 외교술의 전주를 알리는 계기를 만드는 처세외교의 발판이기도 했다.

박동선 사건과 관련해 미국이 청와대를 도청했다는 소문이 떠돌면서 국내에서는 관제데모가 줄을 잇고 시간이 흐를수록 사건은 한미 양국에서 일파만파 커지고 있었다. 박동선이 영국에 잠적해 있는 동안 미국에서는 전 중앙정보부장 김형욱을 청문회에 등장시켜 한국정부와의 연관성을 입증하기 위해 총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당시 코리아 게이트에 대한 미국측의 조사는 크게 세 방향 이었다. 하원 외교위원회의 프레이저 의원, 하원 윤리위원회의 제워스키 검사, 법무성의 시빌리티 검사였다. 영국에 머무르던 박동선이 처음으로 입을 연 것은 77년 8월 이었다.

한국 정부의 요청으로 10개월 만에 서울로 돌아 온 그는 자신의 결백을 주장했지만 불과 열흘 후 미국 법무성은 그를 무려 36개의 혐의 사실로 그를 비밀 기소했다. 박동선의 증언이 자국민 보호를 내세운 한국측의 반대로 무산되면서 수사가 소강상태에 빠지자, 박동선을 보내라는 미국측의 요구는 계속 수위가 높아졌다.

1977년 포드의 뒤를 이어 대통령에 취임한 카터가 친서를 보내 박동선의 미국 송환을 종용했지만 박정희 대통령의 대답은 여전히 한국 정부가 관여할 일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해결의 실마리는 한미양국의 외교적 타협으로 찾아졌다.

19 77년 10월 미국은 벤자민 시빌레티 법무차관을 서울에 보내 박동선의 심문 방법을 협의하고 77년 12월 한미 양측은 박동선의 증언에 관한 사법공조 협정을 체결한다. 각서의 내용은 서울 심문 후 미국 심문을 하고 미 법무성에 박동선에게 면책 특권을 부여 한다는 것이었다.

첫 조사가 시작된 것은 1978년 1월 13일이었다. 한미 양측 검사가 동석한 조사에는 거짓말 탐지기까지 동원됐다. 사건 이후 처음으로 심문에 응하게 된 박동선은 여유있고 당당한 모습으로 조사에 응했다. 세 차례의 거짓말 탐지기 조사를 포함해 7차례, 13일간에 걸쳐 조사는 진행됐다.

조사여부는 박동선의 로비 여부의 불법여부에 대한 것이었다. 그로부터 두 달후인 1978년 2월 26일 박동선은 사건 1년 반만에 미국으로 돌아갔다.


덜레스 공항에서 내뱉은 그의 첫 마디는 워싱턴에 돌아와 기쁘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틀 후 하원의 비밀 증언을 필두로 하원윤리위원회의 공개 증언이 계속 이어졌다. 초만원을 이룬 방청객들 앞에서 이루어진 공개증언이었다. 박동선은 파이프 담배까지 피우는 여유를 보이며 증언을 시작했다.

담당 검사는 닉슨의 워터게이트 사건을 파헤쳤던 제워스키였다. 제워스키는 중앙정보부가 1971년 9월 30일자로 작성한 박동선의 활동 보고서를 비롯해 박동선의 집에서 압수한 금전 출납부와 의원들의 편지 등, 장장 700페이지가 넘는 증거 자료를 제시했다. 모두 박동선이 한국 중앙정보부의 대리인으로 불법 로비활동을 했다는 증거들이다.

의원들을 만난 날짜까지 소상히 적힌 다이어리와 의원들에게 준 액수가 그대로 적혀 있는 금전 출납부, 그러나 박동선은 자신의 결백을 주장했다. 코리아 게이트 7년 전인 1969년 3월, 22명의 미 하원의원들이 박동선의 주선으로 한국을 방문했고 무려 14명의 의원들이 박정희 대통령에게 자신들의 우호적인 태도가 모두 박동선의 활동 덕이라는 편지를 보내왔다. 암암리에 전개된 외교적 전술이 미국의 허를 찌르는 상황을 만든것이다.

그것은 중앙정보부가 작성한 이른바 TS리포트에도 기록되어 있었지만 그 모든것이 미국 국회의원들의 자발적 행동이었다는 것이 박동선의 주장이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오히려 미국 5개주 국회의원들이 자신의 출신주 생산품인 쌀을 사주는 댓가로 한국이 원하는 도움을 주겠다고 먼저 로비를 해 왔고, 전체의 1/3에 해당하는 의원들이 동참했다고 주장했다.

과연 그의 주장은 사실일까?그러나 그것이 사실이고 아니고는 중요한것이 아니었다. 그의 주장처럼 박동선이 미국의 국회의원들과 보다 활발한 접촉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쌀 때문이었다. 쌀은 배고팠던 그당시 우리에겐 대단히 중요한 국익을 위한 품목이었던 것이다.

캘리포니아, 루이지애나, 아칸소 같은 쌀 생산지 의원들에게 주요 쌀 시장인 한국의 박동선 같은 인물은 관심의 대상일 수 밖에 없었다. 70년 한 해에만 무려 백 만톤을 수입했던 한국을 미국의 쌀 시장으로 묶어 둔다면 2년 마다 한 번씩 선거를 치러야 하는 쌀 산지 국회의원들로써는 노다지 표밭을 캐는 셈이었던 것이다. 서로가 필요충분조건이 일치 했다는 것을 알 수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경제개발 이후 대규모 이농으로 쌀 부족 사태를 겪고 있던 한국에서도 쌀은 중요한 정치적 무기였기 때문이다. 쌀 수입과 관련된 막대한 이권은 곧 공화당의 정치자금으로 이어졌다. 1968년 박동선은 리처드 해너 의원과 당시 중앙정보부장인 김형욱의 도움으로 쌀 중계권을 따내는데 성공한다.

박동선과 정부, 미 의원들은 바로 쌀을 계기로 연결됐던 것이다. 그가 쌀 중계권을 획득한 직후인 73년 8월, 청와대 대미 로비는 본격화 된다. 그렇다면 왜 이때 한국 정부는 대미로비를 생각했던 것일까?

1969년 7월, 리처드 닉슨은 괌에서 이른바 닉슨 독트린을 발표한다. 미국은 아시아에서 더 이상 지상군 개입을 하지 않겠다는 것을 골자로 한 새로운 아시아 방위 전략이었다. 그것은 곧 주한미군의 철수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닉슨 독트린이 발표된 직후인 1969년 8월, 박대통령은 미국을 방문해 닉슨과 정상회담을 갖고 주한미군 철수를 반대했으나 닉슨의 태도는 분명했다. 이듬해 3월 주한 미대사 포터가 청와대를 방문해 주한미군 1개 사단 20,000명을 삭감하기로 했다고 통보하고, 5개월 후 미국은 애그뉴 부통령을 보내 반발하는 한국 정부를 설득한다.

철군 대신 5년에 걸쳐 15억 달러 이상의 군사 원조와 5,000만 달러의 평화 식량원조를 제공할 것을 약속한 것이다. 하지만 장장 여섯 시간의 회담을 마치고 애그뉴가 서울을 떠난 지 3일 후 10,000여 명의 미군이 이미 철수했다는 사실이 뒤늦게 발표됐다.

미국에 대한 불신은 대 의회 로비를 생각하게 만든 결정적인 계기였던 것이다. 1969년 삼선개헌에 이어 1972년 유신체제가 선포되면서 미국내에서 박정권의 독재정치에 대한 비난 여론이 일었던 것 역시 중요한 계기였다.

그런 배경하에서 의회의 한국에 대한 여론을 바꿔 놓을 만한 인물로 지목됐던 것이 바로 박동선과 문선명의 통일교 인사인 한국문화재단의 박보희, 볼티모어의 한국인 사업가 김한조 등이었다.

그러나 코리아 게이트의 주역은 박동선이었다.

과연 왜 박동선이었을까?

박동선이 의회 로비의 주역이 될 수 있었던 중요한 배경은 바로 박동선의 모교인 조지 타운대학이었다. 전통적으로 중남미와 미국의 정치 지망생들이 가장 많이 다니는 이곳에서 학생회장까지 지냈던 박동선은 자연스럽게 정치권과의 교분을 쌓을 수 있는 조건을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

졸업 이후 박동선이 설립했던 조지타운 클럽 역시 그에게는 또다른 활동 무대였다. 대학시절의 인맥과 경험을 바탕으로 미국정치, 나아가 세계정치의 중심지인 워싱턴에서 미국의 거물급 정치인들의 사교장을 만들었던 박동선이었다. 그의 조지타운 클럽은 비공식적으로 훨씬 자연스럽게 미국의 정치인들과 친분을 쌓고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발판이었던 것이다.

게다가 조지타운 클럽의 설립자로 언제나 참석자 모두가 만족하는 파티를 주최해왔던 박에게는 언젠가는 이 사교계를 발판으로 미국사회에 남못지 않은 영향력을 행사해 보겠다는 꿈이 있었다. 청와대의 대미 로비 공작이 본격화 됐다는 1970년 경, 당시 국내에서는 미국정치의 로비활동이 어떻게 이루어 지는지 모르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박동선은 이미 미국내의 많은 국회의원들과 두터운 교분을 쌓아두고 있었다. 그리고 미국측의 조사 결과로는 쌀 중계로 번 돈 900만 달러 중 최소한 87만 달러 이상이 그들에게 제공됐다. 그렇다면 박동선은 미국측의 주장대로 한국 중앙정보부의 로비스트였던 것일까?

그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한국언론은 일리노이주에 있는 이재현박사의 집을 찾았다. 그는 70년대 초반 주미 한국대사관 공보관으로 근무하다 박정권의 유신체제에 반발해 망명을 한 인물이다.

아직도 불안속에서 살고 있었던 그는 73년 미 하원의 인권문제소위 프레이저 위원회에서 중앙정보부의 대미활동에 대해 증언한 바 있었다. 그의 증언에 따르면, "어느날 대사관 주재원 간부 소집이 있었다고 한다. 형식적인 대사의 인사말이 끊난 후 난데없이 중앙정보부 책임자가 나서 대사관 직원들에게 하달하는 비밀공작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어쩌면 이것이 국을 위한 외교적 성과를 만들기위한 모험이었는지도 모는다.역사적평가에서는 이런 일련의 과정들이 그당시로는 필요한 것이었는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 내용은 미국사회에서 영향력 있고 비판적인 교포들을 적극적으로 접촉해서 가까이 사귄 후 그들에 대한 결점을 파악한 후 필요시에 그 결점을 빌미로 이용할 수 있도록 준비를 하라는 내용이었다.

이같은 사실을 폭로하면서 이재현 박사는 망명을 결심했다고 한다. 어쩌면 그는 중앙정보부와 박동선과의 관계를 가장 잘 알 수도 있는 인물이었다.

아직도 수십년 전 자료를 고스란히 보관하고 있는 그는 청와대와 박동선의 관계를 이렇게 증언했다. 박동선 게이트는 '박정희의 영구집권에 반발하는 국내외 세력을 무력화 시키기 위한 공작이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박동선 게이트는 박정희대통령과 중앙정보부 그리고 박동선의 삼각라인안에서 대사관도 배제한 채 이루어 졌다'고 한다. 실제로 중앙정보부가 작성했다고 알려진 한 보고서에는 박동선의 활동에 대한 상세한 기록과 나름대로의 평가를 덧붙여 놓고 있다. 그 평가는 결과적으로는 국익을 위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박동선의 기록과도 일치하는 부분이 있다. 하지만 그의 주장은 대부분이 자신의 자발적 행동이었다는 것이다. 당시 국무총리였던 정일권씨를 통해 박정희 대통령을 알게 됐고 쌀 중계권을 매개로 여러 활동을 했지만 결코 대리인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렇게 첫 폭로 기사가 난지 1년 반, 조사와 증언은 계속 됐지만 뚜렷하게 밝혀진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거명된 90여명의 의원들 중 실제로 기소를 당한 의원은 단 두명이었다. 청문희에 쏠린 관심도 사그러 들었다.

박동선이 중앙정보부의 대리인임은 증명되지 않았다. 오히려 박동선과 한국 정부와의 관계는 공생관계라는 시각이 일반화 됐다. 별 성과를 얻지못한 제워스키는 사건 당시 주미 대사였던 김동조의 로비활동을 문제 삼아 증언을 요청했고 외교관의 면책 특권을 부인하는 처사라는 반발속에 제워스키와 김용식 주미 대사와의 외교협상이 계속됐다. 약소국으로서의 우리의 비밀외교적 성과가 수확을 거둬가는 상황이었다.

제워스키는 김동조 대사의 증언을 위해 하원에 압력을 넣어 분원 중단이라는 카드까지 들고 나았지만 결국 김 대사의 증언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비난을 받은 쪽은 제워스키 쪽이었다.

결국 제워스키는 윤리위원회의 수석직을 사퇴한다고 발표하고 윤리위원회는 사실상의 수사 종결 조치를 취했다. 그리고 같은 날 총 11억 6,000만 달러의 대한 군사원조 승인안이 통과됐다. 수사의 촛점은 박동선과 한국 정부였지만 코리아 게이트의 본질은 바로 부패한 미국 의원들에게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사건이 종결된 지 20년... 90년대중반 한 호텔 연회장에서는 지난 10월에 열렸던 하남 환경 박람회의 주빈인 스트롱 박사를 위한 오찬 회의가 있었다. 국내외의 유명 인사들이 참석한 이 행사의 주최자는 바로 코리아 게이트의 주인공 박동선씨였다.

여전히 그는 미국을 비롯한 세계에 한국을 알리는 역할을 하고 있었다. 여전히 아프게 남아있는 20년 전의 일을 거울 삼아서... 20년 후 지금의 한미관계는 과연 어떤 것인가? 20년 전 그때의 사건은 어떤 방법으로 어떻게 미국속 에서 우리의 국익을 관철시켜 나가야하는 것인지 채 마무리지어지지 않은 질문을 던지고 있다.  -2편에 계속-

[타임뉴스=서승만 편집국장]


광역시 충청북도충청남도경상북도전라북도전라남도
서울타임뉴스인천타임뉴스대전타임뉴스대구타임뉴스광주타임뉴스울산타임뉴스부산타임뉴스제주타임뉴스세종타임뉴스태안타임뉴스안동타임뉴스의성타임뉴스군위타임뉴스영양타임뉴스울진타임뉴스문경타임뉴스상주타임뉴스예천타임뉴스영주타임뉴스청송타임뉴스경주타임뉴스영덕타임뉴스구미타임뉴스김천타임뉴스칠곡타임뉴스봉화타임뉴스여수타임뉴스광양타임뉴스순천타임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