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
대기업의 ‘특정 대학 반도체 계약학과’에 정부 지원 논란
서승만 기자 smseo67@naver.com
기사입력 : 2019-04-29 02:33:46
정부 “한국 경제의 버팀목…매칭 펀딩 통해 신기술 확보 나설 것”

[타임뉴스=서승만 기자] 정부와 대기업의 ‘반도체 분야 인재확보’ 방안을 두고 논란이 뜨겁다. 기업이 세계에 유례가 없는 맞춤형 계약학과(기업이 대학에 설치·운영하는 학과)를 특정 대학에 세우는데 정부가 막대한 지원을 하는 것이 바람직하냐는 지적이 나오고 있어서다.

최근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서울대·고려대·카이스트 등과 4년 전액 장학금에 100% 취업을 보장하는 반도체 계약학과 개설을 협의 중이다.

‘졸속 처방’으로 문·이과 갈등…대학 줄세우기·취업 서열화 우려
정부는 반도체 산업의 국가 경쟁력 강화를 위해 대규모 예산을 투입, 기업들의 반도체 인재확보를 적극 독려한다는 방침이다.

한국 경제의 버팀목, 반도체
산업통상자원부는 조만간 범정부 차원에서 발표할 ‘비메모리 반도체 집중 육성 방안’에 대기업의 서울대·연세대·고려대 등 반도체학과(학부) 신설에 관한 정부 지원방안을 포함시킬 것이라고 28일 밝혔다.

정부가 반도체 인재확보에 매달리는 것은 당장 한국 수출 전선에 경고등이 켜졌기 때문이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를 합친 올 1분기 반도체 분야 영업이익은 5조원 규모로 전분기(12조원)의 절반에도 못 미칠 것으로 예상된다.

산업부 관계자는 “반도체 산업은 지난해 전체 수출의 20% 이상을 차지한 한국 경제의 버팀목”이라면서 “(대기업이) 반도체학과를 운영하면 정부는 해당 기업과 5:5 매칭 펀딩을 통해 신기술 확보에 나서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삼성전자는 연세대와 오는 2021년부터 ‘시스템반도체공학과’를 운영하기로 합의했다. 반도체학과는 한 학년당 50~100명 규모로 4년 전액 장학금과 기업이 요청한 학부 커리큘럼을 이수할 경우 취업도 보장한다.

삼성 측은 “기업 입장에서는 생산현장에 바로 투입할 수 있는 인력이 필요하다”면서 “전문성은 떨어지겠지만 재교육하면 된다”고 말했다.

SK 측은 “아직 구체적으로 대학과 커리큘럼을 정하지는 않았다”면서도 “‘우수한’ 인재확보가 절실하다”고 말했다. 반도체 계약학과 첫 사례는 삼성전자가 2008년부터 성균관대에 운영 중인 반도체시스템공학과다.

대학이 직업훈련원으로 전락... 우려의시선
교육계에서는 ‘학문의 전당’이자 ‘지식인 양심의 보루’인 대학이 직업훈련원으로 전락하는 것 아니냐는 우려도 나온다.

서울대 교육학과 곽덕주 교수는 “정부와 대기업이 대학을 경제적 속물인 ‘취업 입시의 장’으로 몰아가고 있다”면서 “세계 유명대학은 문학, 예술, 철학, 종교학, 인류학, 심리학 등 인문학적 소양을 먼저 갖춘 뒤 이공계 전문 분야를 연구하도록 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영국 옥스퍼드 대학과 에든버러 대학 교수를 역임한 저스틴 스토버는 “인문학 소멸의 원인은 학문 자체가 아닌 대학 본연의 목표를 상실하고 취업률에 목매는 취업전담기관으로 전락했기 때문”이라고 말한 바 있다.

실제 삼성과 채용보장 100% 학과를 운영 중인 성대는 2017년 졸업생 취업률이 75.1%로 4년제 대학 중 가장 높았다.

올해는 유일하게 취업률이 70%를 넘어섰다.
“기업이 원하는 인재양성 덕분에 3년 연속 취업률 1위를 차지했다”는 것이 자체 평가다.

교육부가 밝힌 대졸 취업률 현황을 보면 2007년부터 2017년까지 10년간 4년제 대학 인문계열 학과는 14.2%포인트 낮아졌고 자연계열은 11.9%포인트 높아졌다.

박사학위 취득자 취업률은 공학계열이 87.3%에 달했지만 인문계열은 50.9%로 절반에 그쳤다. 서울대에 다니는 장모씨(21)는 “ ‘문송(문과라 죄송)’ ‘문레기’ ‘문과충’ 등의 단어를 들을 때마다 움츠러든다”면서 “정부가 ‘돈 되는 학과’를 밀어주겠다고 하니 시장자본에 상아탑이 무너진 것이 아닌지 씁쓸하다”고 말했다.

이공계 중에서도 특정 대학, 특정 학과 몰아주기가 파벌주의를 낳는다는 우려도 나오고 있다. 한 기업 관계자는 “처음과 달리 특정학과 동기생을 중심으로 집단 이기주의가 생겨나고 사내 갈등 요인이 됐다”며 “기껏 뽑아놓은 인재들이 ‘직업 선택의 자유를 이유’로 이직했다”고 털어놨다.

정부 단기 졸속 처방 논란
정부가 청년 취업마저 서열화하고 있다는 지적도 있다. 반도체 기업들은 “장학금에 취업까지 보장하는데 명문대 출신 ‘우수 인재’를 요구하는 것이 당연한 것 아니냐”는 입장이지만 지방 국립대 등 일부 공과대학은 “정부와 기업이 대놓고 성적순으로 대학생 줄세우기를 하는데 지역균형 발전차원에서라도 다른 대학이 참여해야 한다”고 요구하고 있다.

산업부 관계자는 “반도체학과를 운영하는 기업이 기술개발을 원하면 정부와 절반씩 연구비를 부담해 대학 연구기관에 맡기게 될 것”이라면서 “(기업이 원치 않는) 지방대는 또 다른 지원 방안이 있지 않겠냐”고 말했다.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대기업이 먼저 나선 것은 아닌 것으로 안다”면서 “반도체 분야 교수와 학회에서 워낙 강하게 요구했고 정부도 수출 실적이 걱정되자 앞장섰다고 들었다”고 말했다.

대입 수험생을 비롯한 학부모들의 비판도 나오고 있다. 교육 인터넷 사이트마다 “정부가 앞장서 명문대 이공계, 돈으로 줄세우기를 하다니…” “이번에 연세대가 선택됐으니 성균관대는 X됐다” “대학은 자존심도 없나, 기업 사관학교를 인정해라”는 등 댓글이 끊이지 않고 있다.

서울 강남 대치동 학원가에는 초등생부터 코딩, 알고리즘 등 소프트웨어 실력을 준비해야 한다는 얘기가 나오고 있다.

한양대 과학기술정책학과 김창경 교수는 “수·과학, 지식으로 무장한 인공지능 로봇과 기계는 어려운 문제를 풀 수 있을지 몰라도 문제를 낼 수는 없다”면서 “인간의 생각하는 힘, 창의력을 바탕으로 한 ‘콘텐츠’를 확보해야 한국 산업의 미래가 있다”고 조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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