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지금 애국선열의 애국심을 돌이켜 봐야 할 때
홍대인 | 기사입력 2020-02-20 00:11:20
대전지방보훈청 총무과 황순창
1945년 7월 26일 미국, 영국, 중국은 ‘포츠담 선언’에서 대일(對日)처리 방침을 명시하고 아울러 무조건 항복을 요구한다. 일본이 이를 묵살하자 미국은 8월6일 히로시마, 9일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투하한다. 소련은 일본을 상대로 만주에서 일제히 공격을 한다. 이로 인해 일본 군부는 항복을 결의하고 8월15일 일본왕은 국민에게 항복을 방송했다. 우리나라는 광복을 맞이한다.

대한민국의 광복은 미국이나 여러 강대국에 의해서 그냥 얻어진 것처럼 보인다. 과연 그럴까? 대한민국의 독립은 조국을 되찾겠다는 조상들의 의지가 무장독립운동으로, 만세운동으로, 교육으로, 여러 방면으로 우리 강산뿐 아니라 해외에 까지 독립을 위해 수많은 희생과 헌신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중 대표적인 사건은 중국 길림성의 무오독립선언 및 일본 동경의 2․8독립선언의 영향을 받아 민족대표 33인과 청년․학생․노동자․농민 등이 참여한 한국역사상 최대의 3.1운동이 있다. 이 운동은 1919년 3월 초부터 4월 말까지 2개월 동안 전국적으로 1,542회의 만세시위에 200만 여명이 참여하였으며 7,500여명이 순국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3·1절은 우리 민족이 일본의 식민통치에 항거한 것에 그치지 않고 대한민국의 독립 의사를 세계만방에 알린 역사적인 사건으로 우리 민족뿐 아니라 다른 나라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중국의 5.4운동 발발에 영향을 끼쳤고 인도에서의 비폭력 독립운동을 급속히 고조시키는 단초가 되기도 했다. 이렇듯 세계사적으로도 큰 의의를 남겼다.

그리고, 대한민국 독립에 커다란 영향을 끼치고 중국인에게 감동을 일으켰으며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한 사건이 있다. 이것은 윤봉길의사의 상하이 의거다. 1932년 당시 중국은 상하이사변(1.28사변)으로 일본에 연달아 패퇴하여 민족적 수치에 빠져있었다. 이때 윤봉길의사는 1932년 4월29일 일왕의 생일과 상하이사변 전승기념식이 상하이 홍커우 공원에서 열리자 적군의 심장부에 들어가 폭탄을 투척한다. 이로 인해 일본의 총사령관인 시라카와 요시노리 등 군부를 처단한다. 이 사건은 일본에게 민족적 수치심에 빠진 중국인에게 많은 감동을 주고 장제스가 임시정부와 협력하는 계기가 된다. 이에 김구선생과 임시정부의 주요인사는 장제스에게 대한민국의 독립을 계속 주장하며 카이로회담에서 대한민국의 독립을 주창해 줄 것을 건의한다. 이렇게 카이로회담에서 우리나라의 독립문제가 최초로 논의되고 또한, 그 논의가 “앞으로 적절한 절차를 거쳐 한국에 자유와 독립을 줄 것을 결의한다."고 선언한다. 이것은 당시 수많은 식민지국들이 있었으나 유일하게 대한민국의 독립만을 보장받은 역사적 사건이다.

이렇듯 윤봉길의사의 상하이 의거는 카이로회담에서의 선언에 대한민국 독립에 커다란 영향을 끼친다.

대한민국의 광복은 미국의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 9일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투하하여 일본의 항복으로 그냥 얻어진 것이 아니다. 조국의 광복을 위해 의병으로부터 무장독립운동으로 3·1운동에서 여러 방면으로 우리강산에서 해외까지 애쓰신 분들의 하나하나의 희생과 노력으로 대한민국의 독립이 우연이 아닌 필연이 되었다.

얼마 있으면 3·1절이다. 지금 동북아시아는 그 어느 때 보다 군사적 팽창과 세계는 자국의 이익으로 치열하다. 이런 세계정세에 우리는 조국의 독립을 위해 애쓰신 애국선열들의 애국심을 돌이켜 보며 우리의 자세는 어떠해야 할지 고민해봤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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