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타임뉴스=박승민 = 서태안 Reset]노자(기원전 571~471년)는 '타인을 이기는 것보다 자신을 이기는 사람이 더 강한 사람' 이라는 명구를 남겼다. '타인을 이긴다는 것' 은 ‘스스로에게 없는 외부의 힘을 빌리는 것’ 을 뜻하며 '자신을 이긴다는 것' 은 ‘자신이 갖고 있는 힘(의지)으로 부조리한 세계에 기투하는 것’ 을 의미한다.
2,500년 전 노자가 언급한 ‘외부의 힘을 빌리고자 하는 자’ 에 대해 스페인 철학자 호세 오르테가 이 가제트(1883~1955)은 '대중' 으로 지목했다. 그러면서 대중적인 인간이란 '목표없이 살면서 바람에 표류하는 인간(동물들)" 이라고 선언했다.
'호세' 가 언급한 표류하는 인간이란 "외부의 힘" 을 추종하거나 휩쓸리려는 '한 무리' 에 국한되는 동물로 오늘날 한국 정치인들이 공통으로 사용하는 무기 '바람같은 펜덤 현상' 과 동일하다.
명사 ‘대중’ 은 사실 몹시 거슬리는 단어, 일 만년 공동체 역사를 통해 대중들의 반역(허장성세, 허구, 펜덤, 프로파간다, 선전술 등 )은 국가의 흥망성쇠까지 흔들어 댔다. 한때 세기의 대학자인 소크라테스에게 독약인 미나리즙을 세 사발씩이나 들이키도록 조작했던 시대의 반역자들, 16세기 갈릴레이 갈릴레오가 주장하는 지동설을 허구적인 천동설이라고 궤변을 쏱아내며 재판장에서 엄포를 늘어놓은 이들도(교황청 재판관) 끝내 대중이다.
19세기 비운의 과학자 니콜라 테슬라를 광적으로 벼랑 끝까지 몰고간 토머스 에디슨(1847~1913년), 근대에 이르러 광화문 네거리에 우뚝 서 있는 성웅 이순신을 모함해 임진왜란 중 차꼬까지 채워 200만 명 상당의 민초들 목숨을 빼앗은 원흉도 대중(원균)이였다.
이들의 무기는 포퍼먼스와 자화자찬뿐이다. 때때마다 영웅들을 참소해 사지로 몰았고, 밤새 고랑(엮어 고발)을 파 위기의 흑역사를 몰고 다니는 선출직 공직자, 자치단체장, 민주주의를 주창하는 대통령 등 이들 모두 타짜의 삶(외부의 사물 금은보화)에 구속되어 있는 집착까지 일치한다.
한국사회 뿐 아니라 전세계 무리 짓는 이들 대중을 향해 ‘바람에 표류하는 인간’ 으로 민낯을 벗긴 '호세' 의 명구는 유사 이래 가장 강력하다.
같은 대중이라도 격이 다른 근거를 추구하는 필자의 신분에서 위 '호세' 의 문장에 첨언코저 한다면 '사람(인간)' 을 '미물'로 표기하고 무가치한 ‘사물들’ 로 규정하겠다.
대중의 깨어남이란 절대적 혼돈의 망상이며, 대중의 침묵이란 소요(騷擾 시끄러움)전야에 해당할 뿐이다.
행동은 거들먹거리는 것이 일쑤이며, 염치는 결여되었고 복수는 온데간데 없이 공허하다. 반면 이들 대중은 허상의 권위에 읍조리고 아첨을 일상화하고 일신의 안위만을 도모해 자연의 질서에 해악을 가한다. 선대의 얼이 주는 의미를 알지 못하고, 유산과 자산의 대비한 분별력이 없는 이들은 인간이라면 무치의 원인으로 작용하는 엽전에 중독되어 그 어느 한 구석이라도 쓰임새가 없는 가짜 펜데믹 코로나와 유사 존재로 분류된다.
이들에게 잠들어 있는 시대 정신은 비속할 정도로 저속하고 황금만능주의, 배금주의(拜金主義)는 마치 헬륨풍선에 올라탄 것처럼 아득한 '사물들(구름같은 존재)' 로 남았다. 이들은 몇 백년 전 '아는 것이 힘' 이라 했던 프린시스 베이컨의 지속적이고 영속적인 권위를 퇴폐적인 시장주의라고 찬양하며 집단으로 구타를 가했다. 그러면서 한 무리를 짓고 한껏 뽐내는 맨살에는 '권위' 라고 애써 끄적거린 포스트잇을 덕지덕지 붙히고도 부끄러움조차 느끼지 못한다.
꼽씹을 절대성은 철지난 시절로 취급하기 일쑤이고 그저 입 언저리에 아로새긴 비아냥과 조소는 조잡한 생채기를 남길 것이라는 진리조차 알지 못한다.
음지 또는 양지 또한 엄연히 다를진대 번번히 흔들리는 갈짓자 걸음으로 선대가 베풀어준 스스로의 존재조차 부인하는 대중의 지각력 정도는 러시아의 대문호 도스토예프스키(1821~1881년)의 명작 '죄와 벌' 의 주연 라스콜니코프의 자백 "바로 제가 그때 (고리대금업자)관리 미망인인 노파와 그 여동생 리자베타를 도끼로 살해하고 금품을 훔쳤습니다" 고 했던 진정한 의미조차 알지 못할 것인 바 이들을 총칭해 '바람에 표류하는 인간' 이라 손가락질 한들 무에 비난 받겠는가.
이러한 대중들이 정치ㆍ경제ㆍ종교계에 발가벗은 수치를 담금질하면서도 '같은 강물에 두 번 발을 담글 수 없다' 는 시차의 속성조차 알지 못한채 오직 개인의 영달만을 위해 비천한 행동까지 밤낮으로 서슴치 않는 이들의 선전책동 대비 저급하다고 촌평을 받는 '호세 오르테가 이 가제트' 의 '대중의 반역' 역설은 제나라의 명재상 안영(기원전 500년 경)의 이도삼살사(二桃三殺士)에 견준들 논박할 수 없는 미물에 불과하겠다.
이들의 그 뻔뻔함이란 조삼모사와 같아 시시각각 변화하고, 그 비열하고 저속함에 놀란 조물주조차 오죽하면 사흘 밤, 사흘 낮 빗줄기를 퍼부어 노아만 살리고 괴멸을 꾀하려 했는지 짐작할 수 있을 정도로 의식하지 말아야 할 '비천한 사물들' 이다.
이들에게 시대의 고통은 타짜의 일이며 절대적 망상으로 낮을 소일하고, 어둠이 내리면 한단지몽(邯鄲之夢)에 취해 안도(安堵 만리장성 밖)에 갇혀 Freedom(권위에 종속되지 않는 자유)한 날개를 갖고도 찾을 수 없는 금수보다 못한 존재들이다.
그러면서 낡은 조소와 삵아버린 비아냥을 마치 무기라도 되는 양 품고 다니며 그리스 신화 에크리시톤(제 살을 갉아먹는)처럼 일생을 소비한다. 이들을 통털어 ‘널부러진 유령들의 혼돈’ 으로 몰아버린 단테(1265~1321년)는 9개의 구렁을 만들어 이들의 최종 선택지인 신곡(神曲)을 만들었다. 가히 천하에 명작이며 고전 중 최상으로 꼽는 이유는 '대중들의 업'을 적나라하게 노출했다는 것으로 평가된다.
한국의 역사를 다루는 브루스 커밍스(1943~현)는 철학자 ‘호세 오르테가 이 가세트' 의 말을 빗대 ’국가를 위대하게 만드는 것은 위대한 사람들을 배출하는 것이 아니라 대중이 대중을 벗어나 실체적 위상을 회복하는 것만이 가능하다‘ 고 언급한 바 있다.
이 말의 의미는 근거있는 이분법으로 사냥에 나설 것을 권장하는 것이며, 무차별 경쟁을 내려놓고 각 개체별 '차이' 를 발굴하는 네적 탐험의 세계를 찾는 것만이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온토(Onto 실재)의 강을 건너는 위대한 지름길로서 이 진실을 대중들이 지각해야 한다는 것으로 이해된다.
좁게는 가족에서 넓게는 국가에 이르기까지 실체적 권위(브레인)에 등을 돌리는 대중, 빈 깡통에 명구를 카피해 허구적 권위를 해체하는 위대한 일은 대중이 할 일은 아니겠으나, 최소한 선대가 남긴 내적 X파일을 찾아가는 노력이라도 기울여야 다시 상기할수 없는 망각의 강에 다다랐을 때 여한을 남기지 않는 최소한의 선택이라는 것은 인지했으면 한다.
자신에게 변화를 꾀한다는 것은 거시적 표상을 쫓는 소용돌이 문제가 아니라, 자신의 내부에 파편화된 아Q정전(루쉰 1881~1936년)를 일소(一掃)하고 미시의 세계를 탐독하는 것만이 최적의 온전한 삶이라는 것을 강조하고자 한다.
단적으로 사람의 잔혹함은 체코의 밀란 쿤데라(1923~2023년)의 역작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에서 ‘그들은 서로 사랑했는데도 상대방에게 하나의 지옥을 선사했다’ 라고 언급하며 사람이란 동물의 속성을 명증했다. 이와 달리 인간으로 거듭나고자 한 강목(綱目)으로 내일을 위해 오늘 아첨하지 않아야 하며 사람이 만든 프로파간다(선전 선동)에 부화뇌동하지 않는 자로 남아 심연속에 숨어있는 X (무한한 가능성)를 발견해 오직 비판하는 사람으로 곳추 태어날 것을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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