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남서부보훈지청, 우리고장 독립유공자 알리기 여섯 번째 ‘한용운 선생’
홍대인 | 기사입력 2016-04-11 20:53:44
[대전=홍대인 기자] 만해 한용운 선생은 1879년 8월 29일에 충청남도 홍성군 결성면 성곡리에서 태어났다.

6세부터 향리 서당에서 10년 동안 한학(漢學)을 익혔고, 14세에 고향에서 성혼의 예식을 올렸다.

1896년에 설악산 오세암에 들어가 절의 일을 거들다가 승려가 된 후 불교의 기초지식을 섭렵하고 선(禪)을 닦았다. 이후 다른 세계에 대한 관심으로 인해 시베리아와 만주 등지를 여행한 후 1905년에 재입산하여 설악산 백담사에서 연곡을 은사로 하여 정식으로 득도했다.

1910년에 한일합방이 되면서 우리말도 마음껏 쓸 수 없는 상황에 이르자 그는 중국 동북삼성(東北三省)으로 건너가 만주 지역에 소재한 우리 독립군 훈련장들을 순방하며 독립정신과 민족혼을 심어주는 데 주력했다.

1910년 선생은 당시 모순과 부패가 만연하던 한국불교의 상황을 개탄하며 개혁방안을 제시한 실천적 지침서 「조선불교유신론」을 백담사에서 탈고했고, 1913년에 이를 발간함으로써 불교계에 일대 혁신을 일으켰다.

1911년 친일승려 이회광 일파가 한국의 원종(圓宗)과 일본 조동종(曹洞宗)의 합병을 발표하자 선생은 이를 정치적 상황에 편승한 친일매불(親日賣佛) 행위로 단정했다. 그리하여 이회광 일파를 종문난적으로 규정하고 박한영 · 진진응 · 김종래 등과 함께 송광사에서 승려궐기대회를 개최하는 한편 원종에 대응하는 임제종(臨濟宗)을 창립하여 송광사에 종무원을 두고 전국에 격문을 돌려 큰 호응을 받았다.

이후 불교를 대중화하고 민족의식을 고취하기 위해 1914년 4월에 방대한 고려대장경을 독파한 후 「불교대전」을 간행했고, 1918년에는 본격적인 불교잡지 「유심(惟心)」을 발간했다.

1919년 선생은 천도교 · 기독교 · 불교계 등 종교계를 중심으로 추진된 전국적이며 거족적인 3·1운동 계획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그리하여 불교 측 인사들과의 접촉을 위해 범어사까지 다녀오는 등 동분서주하는 동시에 해인사 승려로서 서울에 올라와 있던 백용성 선사를 민족대표로 서명하게 했다.

선생은 불교계 측에 독립선언서를 배포하는 일도 맡았다. 2월 28일 선생은 독립선언서를 인쇄한 보성사 사장 이종일로부터 3천여 매의 독립선언서를 인수했고, 이를 불교학교 중앙학림 학생인 정병헌 · 오택언 · 전규현 · 신상환 등에게 건네주며 3월 1일 오후 2시 이후에 시내 일원에 배포하도록 했다.

1919년 3월 1일 오후 2시에 종로 태화관에 모인 민족대표들은 이종일이 가져온 선언서를 돌려보는 것으로 낭독을 대신하고 선생에게 간단한 식사(式辭)를 부탁했다. 이에 선생은 “오늘 우리가 집합한 것은 조선의 독립을 선언하기 위한 것으로 자못 영광스러운 날이며, 우리는 민족대표로서 이와 같은 선언을 하게 되어 그 책임이 중하니 금후 공동 협심하여 조선독립을 기도하지 않으면 안 된다." 라는 연설을 하고 만세삼창을 선창했다.

독립선언식을 가진 뒤 그 자리에 참석했던 민족대표들은 모두 일경에 피체되었다. 선생은 옥중에서도 의인답게 태연한 모습을 보였지만 일부 민족대표들 가운데는 불안과 절망에 빠져 소란스러운 사람도 있었는데, 선생은 그들에게 호통을 치며 경종을 울려 주었다. 나아가 1919년 7월 10일에는 경성지방법원 검사장의 요구로 「조선독립에 대한 감상」이란 논설을 집필하여 명쾌한 논리로 조선독립의 정당성을 설파했다.

1921년 12월 21일에 석방된 선생은 1922년부터 전국적으로 확산된 물산장려운동을 지원했고, 1923년에는 조선민립대학기성회 상무위원으로 피선되어 활동하면서 민족경제 육성과 사립대학 건립에 힘썼다.

1924년에는 불교청년회 회장으로 취임한 뒤 총독부에 대하여 당당히 정교(政敎)의 분립을 주장하며 사찰령의 폐지를 요구했다. 또한 중앙의 불교 행정기관을 각성시켜 불합리한 법규를 정정케 하고 대중 불교의 전통을 되살리는 데 전력을 기울여 적지 않은 성과를 올렸다.

1926년에 88편의 시를 모아 「님의 침묵」이라는 첫 시집을 발간하고 시조와 한시를 포함하여 모두 300여 편에 달하는 시를 남겼다. 선생은 시를 통해 독립에 대한 신념과 희망을 사랑의 노래로 형상화했다. 또한 「죽음」, 「흑풍(黑風)」, 「후회」, 「박명(薄命)」, 「철혈미인(鐵血美人)」 등의 소설을 남기며 민족운동을 전개하기도 했다.

1927년 2월 좌우합작 민족협동전선으로 ‘신간회’ 창설이 추진되자 발기인으로 참여하고 신간회가 창립된 뒤에는 경성지회장으로 피선되어 활동했다.

1930년 5월에는 김법린 · 최범술 · 김상호 등 20여 명의 청년 불교도들이 비밀리에 조직한 항일운동단체 ‘만당(卍黨)’의 당수로 취임했다. 만당은 경상남도 사천의 다솔사를 근거지로 하여 국내 일원과 동경에 지부를 설치하고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다 1938년 말 일경에 발각되어 와해되고 말았다.

1931년 그는 잡지 <불교>를 인수하여 속간하면서 불교의 대중화와 민족의식 고취에 힘썼다. 특히 고루한 전통에 안주하는 불교를 통렬히 비판하고 승려의 자질향상 · 기강확립 · 생활불교 등을 제창했다.

그가 55세가 되던 1933년, 그는 벽산 스님이 기증한 지금의 성북동 집터에 심우장(尋牛莊)이라는 택호의 집을 짓고 입적할 때까지 여기서 여생을 보냈다. 집을 지을 때 선생을 돕던 인사들이 여름에 시원하고 겨울에 볕이 잘 드는 남향으로 터를 잡을 것을 권유했지만, 총독부 청사가 보기 싫다고 하며 끝내 동북방향으로 집을 틀어 버리고 말았다.

선생은 교우관계에 있어서도 좋고 싫음이 분명하여, 뜻을 함께한 동지들에 대하여는 매우 깊은 의리를 보여준 반면, 변절한 친일인사에 대하여는 설령 이전에 친분이 깊었거나 함께 독립운동을 하였다고 하더라도 단호히 절교하고 일체 상대하지 않았다. 그 예로 만주에서 독립투쟁을 전개하다 피체되어 마포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던 김동삼이 1937년 3월에 옥중에서 순국하자 유해를 심우장으로 모시고 와 5일장을 치러 주었지만, 3·1운동의 동지였다가 변절한 최린이 심우장을 방문하자 끝내 만나주지 않았다. 이에 무안해진 최린이 선생의 딸에게 돈을 쥐어주고 돌아갔는데, 이 사실을 안 선생은 부인과 딸에게 호통을 친 후 최린의 집으로 달려가 그 돈을 집어 던지고 되돌아 왔다고 한다.

일제 말기의 발악적인 총동원 체제 하에 자행된 황민화 정책의 거센 파도 속에서도 선생은 민족적 의기를 꺾지 않았다. 그리하여 환갑을 넘긴 나이에도 불구하고 창씨개명 반대운동(1940년) · 조선인 학병출정 반대운동(1943) 등을 펼쳤다.

그러던 중 우리 민족이 낳은 위대한 승려이자 저항시인이자 독립투사인 선생은 1944년 6월 29일 그토록 그리던 조국광복과 민족독립을 눈앞에 두고 입적하고 말았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려 1962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