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옥훈련’과 사선을 넘다
대한민국 특수임무유공자회 부천시지회 김선광 회장
| 기사입력 2013-06-26 17:53:26

[부천타임뉴스 =김은기 기자]“북한은 여러 번 다녀왔습니다. 제가 주로 맡은 임무는 북한군 동향 관련 정보를 알아오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복무하던 70년대 초반은 위성이나 정보기술이 발달하지 못했던 터라 사람이 직접 가서 정보를 모아야했습니다.

대한민국 특수임무유공자회 부천시지회 김선광(60) 회장은 북파공작원으로 739월부터 768월까지 복무 이야기다

신체검사장을 나오는데 어떤 사람이 ‘2000만 원을 주겠다. 좀 힘든 부대지만 외출외박도 일반부대와 똑같은 부대에서 돈도 벌며 군생활 해 볼 생각은 없냐?’고 말했다. 당시 집 한 채에 300만 원 하던 시절이라 그런 조건이라면 괜찮겠다 싶어 신청했다.”당시 21살의 김 회장은 동아건설에서 토목직으로 일하던 중이었다. 신체검사를 받던 곳에서 모집하던 물색관을 만나 입사를 결심했다.

동기 32명과 도착한 곳은 지금의 강원도 고성군 토석면 근처였다. 그리고 거기서 말 그대로 지옥훈련을 받았다. 천리행군(400km)45일 안에 걸어서 주파해야 했고, 보급이 없는 상황을 견디기 위해 개미를 핥아먹고, 나무껍질을 벗겨 먹고 16kg의 모래배낭을 매고, 발에는 3kg의 모래주머니를 차고 산을 뛰어다녀야 했고 매일 아침 구보는 맨발로 6km를 뛰는 것이었다.”

김 회장의 부대의 목표는 19684월 박정희 대통령을 암살하기 위해 남파되었던 북한의 124부대였다. “그들보다 같은 일을 1초라도 빨리해야했고, 같은 시간에 1m라도 더 가야했다. 그들이 30초에 10발을 목표에 명중시켰으면 11발을 명중해야했다.”김 회장의 부대의 임무도 북한의 124부대와 같았다. 북한에 직접 침투해서 요인 암살, 정보 수집, 주요 시설 폭파 등이었다. 이를 위해 북한군의 계급을 익히고 북한군의 장비를 썼다. 제식훈련도 북한군의 것을 그대로 했다. 그리고 이 부대의 존재는 철저히 비밀이었다.

훈련을 거치고 난 후 김 회장은 휴전선을 넘어 북한으로 넘어가 활동했다. 임무는 정보수집이 주된 일이었다. 지금이야 각종 첨단장비가 많아져 그 필요가 많이 줄긴 했지만 그 당시는 북한군의 동향과 배치, 그 외의 관련 정보를 알기 위해서는 직접 사람이 침투해 들어가 파악하는 수 밖에 없었다.

모든게 위험했다. 걸어서 휴전선을 넘어가서 북한 땅에서 임무를 수행하는 것도 어려웠고, 비무장지대의 지뢰밭을 통과하는 것도 쉬운일이 아니었다. 돌아오는 길에 지뢰 배치를 아는 비무장지대의 수색대와 약속한 시간에 만나지 못하면 죽을 수 밖에 없었다.”

김 회장도 북한을 여러 번 다녀왔다. 작전의 내용은 구체적으로 밝힐 수는 없지만 북한의 인민재판 현장을 직접 촬영해 모든 군의 교육용 영상으로 쓰기도 했다.

제대는 768월에 했다. 약속한 돈은 없었다. 제대한 후 며칠 뒤인 818일 휴전선의 도끼만행사건이 일어나 원대복귀명령이 떨어졌다. 그 당시는 바로 북한을 공격하기로 하고 공격날짜까지 정해 놓은 상황이었다. 다행히 전쟁이 일어나진 않았고 나는 다시 사회로 돌아갈 수 있었다

김 회장은 제대 후 다시 동아건설에 복직해서 건설과 토목 쪽의 일을 꾸준히 해왔다. 그러나 북파공작원으로 복무했다는 사실로 인해 사람들의 시선이 따가웠다.

다시 복직했는데 사람들이 시선이 곱지 않았다. 북파공작원은 전과자들이 범죄기록 말소를 조건으로 다녀오는 곳이라고 알려졌기 때문이다. 실제 1968년도 초기에는 전과자나 사형수를 부대원으로 쓰기도 했다. 비율은 전체의 30% 정도, 그러나 그런 사람들이 북한에서 활동하다 포섭되는 사람이 생기자 양친이 살아있는 최소 중졸 이상 학력자를 선발했다.”

북파공작원으로 생활했던 사람은 모두 약 13000여 명이다. 그 중에서 약 7000여 명은 사망했고 현재 살아있는 사람은 6000여 명 정도이다. 지금도 부대는 축소되어 있으나 존재하는 부대이기도 하다.

김 회장은 북파공작원에 대한 사회의 오해가 없어지고 그들의 한 역할을 인정을 받기를 바란다.

북파공작원은 쉽게 파악하기 어려운 북한의 동향을 직접 가서 알아오고, 강력한 전력으로 북한의 도발을 막는 등의 역할을 했다고 생각한다. 그들의 공을 인정해 주는 사회가 되었으면 한다. 그들은 군 생활 동안 많은 고생을 했다. 극한 상황에서 목숨을 걸고 임무를 수행하며, 단 한차례 외출외박휴가 없이 완벽히 격리되어 제대 후 일상에 쉽게 적응을 못한다. 전과자라는 오해도 견디기 어려운 것 중에 하나이다.”

마지막으로 젊은 사람들에게나는 대한민국 국민이고 이 나라가 너무나 소중하다는 것을 알았으면 한다. 이 나라의 평화를 위해 헌신한 사람들이 주변에 많이 있다는 것도 잊지 말았으면 한다.” 고 투철한 국가관과 안보관을 부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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