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주사지 3만7천여㎡ 보호구역 추가지정 추진
| 기사입력 2009-05-03 14:08:47

통일신라시대 구산선문(九山禪門-신라말 고려 초기에 성립한 禪宗 각파에 대한 총칭)의 중심지였던 성주사지의 보호구역이 확대 지정된다.



문화재청(청장 이건무)은 보령시 성주면 성주리 73번지 등 34필지 3만 7358㎡를 국가지정문화재(사적) 보호구역으로 추가 지정하기 위해 28일자 관보(제16990호)에 공고했다.



이번 보호구역 추가 지정은 성주사지의 사역으로 추정되는 구역의 추가 발굴 조사와 역사문화환경 보존을 위해서다. 이로서 국가차원에서 보호하게 될 성주사지 보호구역은 42필지 6만7295㎡로 확대된다.



1984년 사적 307호로 지정된 성주사지에는 국보1호인 숭례문과 함께 1962년 12월 20일 지정된 국보 제8호 낭혜화상 백월 보광탑비가 있다.

성주사지는 통일신라시대의 다른 절과는 달리 평지에 자리하는 가람의 형식을 택하고 있는데, 절터에는 남에서부터 차례로 중문처, 석등, 5층 석탑(보물 제19호), 금당건물과 그 뒤에 동서로 나란히 서있는 동삼층 석탑, 중앙 3층 석탑(보물 제20호), 서 3층 석탑(보물 제47호)이 있고 그 뒤에 강당이 자리하고 있다. 최치원의 사산비문 중 하나인 낭혜화상 백월 보광탑비(국보 제8호)도 절의 북서쪽에 있다.



1968년과 1974년 발굴조사결과 건물의 초석, 통일신라시대의 흙으로 빚은 불상의 머리, 백제·통일신라·고려시대의 기와 등 많은 유물이 출토됐다.



성주사는 당대 최대의 사찰이었으며, 낭혜화상 백월 보광탑비(이하 낭혜비)는 신라 석비 중 가장 큰 작품으로 매우 중요한 학술적 가치를 지닌다. 낭혜비는 성주사터에 남아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승려 낭혜화상 무염(無染)의 탑비다.



낭혜화상은 무열왕의 8대손으로, 애장왕 2년(801)에 태어나 열세 살 되던 해에 출가했다. 헌덕왕 13년(821)에 당나라로 유학하여 수도를 통해 깨달음을 얻게 되었고 문성왕 7년(845)에 귀국하여 당시 웅천(지금의 보령)에 있던 오합사(烏合寺)의 주지가 됐다.



이 절에서 선(禪)을 널리 알리어 절이 점점 크게 번성하게 되자, 왕은 ‘성주사’라는 절 이름을 내려주었으며, 진성여왕 2년(888) 89세로 이 절에서 입적하니 왕은 시호를 ‘낭혜’라 하고, 탑 이름을 ‘백월보광’이라 내리었다.



절터 서북쪽에 세워진 이 비는 거북 모습의 받침돌 위에 비몸을 세우고 그 위로 머릿돌을 얹은 모습으로, 받침돌이 심하게 부서진 채 흙에 묻혀 있던 것을 1974년에 해체·보수했다.



통일신라시대에 만들어진 탑비 중에서 가장 거대한 풍채를 자랑하며, 화려하고 아름다운 조각솜씨가 작품 속에서 유감없이 발휘되어 통일신라시대 최고의 수준을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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