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의 독립운동가 심남일(沈南一)선생
| 기사입력 2010-10-30 11:12:40

호남벌을 호령한 불세출의 의병장



국가보훈처는 광복회·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1908년 의병을 조직하여 호남 각지에서 일본군에게 타격을 가하고 1909년 일본군의 남한폭도대토벌작전으로 체포되어 사형 순국한 심남일 선생을 11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



심남일선생은 전라도 함평 월야면 정산리 신기에서 심의봉과 진주 강씨 사이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선생은 관직을 역임한 적은 없으나 학식이 있어 서당 훈장을 지냈으며, 손수 농사를 지으며 부인과 2남 3녀를 거느린 가장이었다.



1905년 을사늑약을 계기로 일제의 침략이 본격화되었고 곡창지대인 호남 일대에 일제의 경제 수탈이 극심해지자 심남일 선생은 의병을 일으킬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그러나 명망이 높은 유학자도, 재력 있는 부호도 아닌 선생이 의병을 일으키는 것은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다.



이에 선생은 1907년 후반 전남 서부지역을 중심으로 활동 중이던 호남창의회맹소에 가담하여 기삼연 의병장 휘하에서 항일투쟁을 전개했다.



그러나 1908년 2월 의병장 기삼연이 체포, 총살되고 김율, 김태원 등 수뇌부를 비롯한 다수의 의병이 전사하여 의진이 와해되자 선생은 굳건한 항일의지로 의병을 다시 불러 모아 독자적인 의병부대를 결성한다.



선봉-중군-후군의 전통적인 삼군체제를 확립하고 의병들이 지켜야 할 10개 조항을 고시하여 재물의 강탈을 금지시키는 등 의진의 기강을 바로 세워 민심의 적극적인 지지 속에 대일항전을 계속해 나갔다.



1908년 음력 3월 강진 오치동 전투를 시작으로 능주 노구두, 함평 석문산, 능주 석정, 남평 거성동, 보성 천동을 비롯하여 1909년 음력 7월 장흥 봉무동 전투까지 일본 군경에 막대한 피해를 입히는 등 전남 중남부 지역 대표적 의병부대로 성장한 심남일 의진은 일본의 국권강탈과 경제적 침탈, 단발 강요, 일본인관리의 임명, 군대해산과 황제양위 등에 대하여 강력히 반발하고, 친일세력과 일본세력 구축을 기치로 활동을 전개해나갔다.



심남일선생은 기세를 몰아 의진 간의 연합을 주장하고 전남의 동부 안규홍 의진, 서부 전해산 의진 등 여러 의진과 두로 접촉하여 호남동의단을 결성하고 연합투쟁을 전개한다.



이에 일제는 1908년 후반부터 선생을 체포하는데 혈안이 된다.



그들은 선생을 비롯한 호남의병을 완전히 진압하기 위해 강력한 군사작전을 모색하고 이른바 ‘남한폭도대토벌작전’을 전개한다.



1909년 8월부터 2개월간의 토벌은 살육, 방화, 약탈, 폭행 등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행되어 수많은 의병장과 의병들이 피살, 체포된다.



1909년 10월 9일 선생은 부대장 강무경과 함께 일본군의 집요한 추적을 피해 잠복해 있다가 체포되었고, 그 1년 후인 1910년 10월 4일 대구 감옥에서 사형 순국한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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