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도 시대의 돗토리 현의 상황’이란 제목의 이 서류 3페이지에 박어둔이 기록되어 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693년 3월 27일 안용복 박어둔 두 사람이 일본으로 왔다....(중략)...그해 6월4일 요나고(米子古 · 돗토리 현의 수읍) 가납향(加納鄕)에서 우에몽(右衛門 · 벼슬 이름)에서 오세끼 다타헤이(尾關忠兵衛)가 안용복 박어둔 두 사람을 심문했다.
안용복(안핀샤로 기록)은 평사(評事 ※조선 시대 병마절도사의 보좌관인 정6품 외직 무관직)로 동래 사람이며 일본어 통역사(和語通詞)이었다. 나이는 42세 (실제는 36세이며 나이를 의도적으로 올린 것이다)
박어둔(도라혜이로 기록)은 울산 사람이며 양인이다. 나이는 34세. 그는 시종일관 붓과 벼루(筆硯)를 놓지 않고(執) 기록하며 대담했다. 그가 쓴 한자는 고체 한자로 일본과 달랐다.
오세키가 이들을 일단 정회소(町會所 · 마을회관)에 가두었다. 그들이 온 목적은 죽도(울릉도)에서 오야(大谷), 무라가와(村川) 가문에서 나간 일본 어민들과 다투고 일본인들의 출어금지를 요청하기 위해 온 것이었다....』
김문길 이사는 이 문서가 박어둔의 존재나 활약을 부정해 온 사람들에게 결정적 자료가 된다고 주장했다. 박어둔이 일본에 간 적이 없다고 주장 하는 이들에게 정면 반박자료로서 박어둔 선양회에 의미를 더해주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박어둔은 필연(붓과 벼루)을 지참하고 한문을 자유자재로 구사한 문사였음을 알려주는 것으로 우리가 흔히 아는 무식한 소금꾼인 염간인 것만은 절대 아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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