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운하 국회의원이 8일 대전 중구 어남동 도리미마을 단재 신채호 선생 생가지에서 열린 탄신 145주년 기념행사에서 헌사를 하고 있다
이날 헌사를 맡은 황운하 국회의원(단재신채호선생기념사업회 상임대표)은 단재 신채호 선생의 전 생애를 세밀하게 되짚으며 “단재의 삶은 선택과 행동이 만들어낸 치열한 역사"라고 규정했다.
그는 “90년 전 선생이 생을 마감한 뤼순 감옥은 오늘보다 훨씬 혹독한 환경이었을 것"이라며 “친일 인사가 보증인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출소를 거부하고 마지막까지 얼음장 같은 옥방에 남아 순국을 선택한 결단은 후세가 쉽게 헤아릴 수 없는 무게였다"고 말했다. 황 의원은 단재 선생의 일생을 연대기 순으로 정리하며 각 시기의 선택이 어떤 의미를 지녔는지 상세히 설명했다. 그는 “26세의 단재는 성균관 박사로 관직이 보장된 삶을 버리고 황성신문 항일 논객의 길을 선택했고, 28세에는 왕정과 구질서를 벗어난 민중 중심의 공화국을 세우자는 신민회의 핵심 인물이 됐다"고 말했다. 이어 “29세에는 독사신론을 통해 근대 민족사학의 토대를 세웠고, 35세에는 국외 독립군 기지 건설을 위해 서간도 로이주로 떠나 기약 없는 해외 투쟁을 감행했다"고 덧붙였다. 그는 단재 선생의 개인적 결단까지 언급하며 “38세에 조카딸이 친일파와 결혼하는 것을 막지 못하자 단호히 절연했고, 같은 해 발표한 대동단결 선언은 공화주의적 독립운동의 철학을 정초했다"고 설명했다. 또한 “40세에는 임시정부 국무총리로 선출된 이승만을 이완용보다 더 큰 역적이라며 비판하고 임시정부와 결별했고, 44세에는 의열단 조선혁명선언을 집필해 무장투쟁 노선에 결정적 전환점을 남겼다"고 강조했다. 황 의원은 단재 선생의 마지막 선택 역시 한국 독립운동사에서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고 평가했다. 그는 “단재 선생은 49세에 체포돼 옥중에서도 병보석을 거부했고, 57세에 이르러 뤼순 감옥에서 뇌일혈로 순국했다"며 “그의 생애는 탐욕과 보신, 타협과 망설임을 배제한 헌신·희생·도전·결단의 연속이었다"고 말했다. 이어 “단재 선생은 자신의 삶으로 대한민국 국민 각자의 가슴에 작은 칼 하나를 남겨주었다. 그 칼은 자유와 민주주의, 공화주의를 지키는 구호가 되고 촛불이 되고 응원이 됐다"며 “선생이 마지막으로 바라본 조국을 후세가 더 자랑스러운 나라로 만들겠다"고 다짐했다. 도리미마을은 단재 신채호 선생이 1880년 대전 중구에서 태어나 유년기를 보내고 민족사관·독립운동 사상의 뿌리를 형성한 장소다. 대전시는 1992년 생가지 발굴·고증을 통해 복원한 이후, 1996년 동상 건립, 2015년 홍보관 개관, 2019년 서대전시민공원 동상 설치 등 단재 정신 보존에 지속적으로 투자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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