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봉길 의사는 1908년 예산에서 출생하여 1919년 3월 1일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나자 일제의 식민지교육을 거부하고 서당인 오치서숙(烏致書塾)에서 한학을 수학했다. 1926년 오치서숙(烏致書塾)을 졸업하고 독학으로 국사와 신학문을 공부했으며 농민운동에 관심을 갖고 학교에 다니지 못하는 농촌 청소년들에게 한글, 역사 등을 가르치면서 수업의 교재로 ‘농민독본’을 저술하여 농촌청년들의 단결과 민족정신을 배양하고 애국정신을 고취시켰다.
이후 일제의 탄압이 날로 심해지자 중국으로 망명하여 김구 선생이 이끌던 ‘한인애국단’에 가입하였다. 당시 만주군벌의 실질적 배후였던 일본은 직접 전면으로 나서서 중국 본토침략을 본격화하였다. 1932년 4월 29일 일왕(日王)의 생일을 맞아 상해 점령 전승기념 축하행사를 거행하자 윤봉길의사는 단상을 향해 폭탄을 투척하여 총사령관인 사다쓰구 등 2명을 죽이고, 고위관료 5명에게 부상을 입혔다. 거사 직후 현장에서 체포되어 일본국법회의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1932년 12월 19일 이시카와현 금택형무소 교외에서 25세의 일기로 순국했다.
이 사건은 중국과 세계에 일본의 불법적인 조선침략을 알리는 계기가 되었고, 이후 중국정부가 상해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지원하여 대한광복군과 함께 연합전선을 펼쳐 일본에 항거하는 시작점이 되었다.
윤봉길 의사는 만 24년 6개월이라는 짧은 생애를 살았다. 하지만 일제 식민지 치하에서 우리나라가 독립할 수 있는 직접적인 계기를 만든 장본인으로 가장 치열하면서도 압축적인 삶을 살았다고 할 수 있다. 대한민국이 독립하기 2년 전인 1943년 11월 22일에서 26일까지 이집트의 수도 카이로에서는 미국, 영국, 중국의 수뇌들이 모여 제 2차세계대전의 뒷처리를 위한 회담이 열렸다. 이 자리에서 윤봉길 의사의 의거를 높게 평가한 중국 주석 장제스는 한국 독립을 강력하게 주장했고, 12월 발표된 카이로 선언문에서 ‘적절한 절차를 거쳐 한국이 자유롭고 독립적으로 해방되어야 한다’라는 특별 조항이 들어가게 했다.
윤봉길 의사는 훙커우 의거의 실행을 위해 집을 떠나기 전 남긴 유언인 ‘장부출가생불환(丈夫出家生不還: 사나이가 집을 나가니 살아 돌아오지 않겠다)’의 마음으로 나라를 구하겠다는 강인한 사랑을 실천해 한국의 독립과 한·중 연합에 결정적으로 기여한 위대한 성자(聖者)라고 하겠다.
우리는 산업화와 민주화를 동시에 이룩한 세계 유일의 국가다. 이것은 결코 기적이거나 신화가 아니며, 윤봉길 의사를 비롯한 독립운동가들의 순국과 호국영령들의 희생을 바탕으로 우리 국민의 피와 땀과 눈물로 일궈 낸 성공의 역사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자라나는 학생들이 모두 알 수 있도록 그리고 자부심을 가질 수 있도록 윤봉길 의사의 순국 94주기를 맞아 더욱 선양하고 전파해 나라 사랑의 정신을 고취시켜야 한다,
댓글
댓글 기능은 준비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