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주 시내를 흐르는 서천을 배경으로 이종근 시인(필자)
그중에서 시내에 자리한 <삼판서 고택(三判書古宅)>은 단순한 옛집을 넘어, 고려 말에서 조선 초로 넘어가는 격동의 시대 속 지식인들의 고뇌와 통치 철학이 서려 있는 특별한 장소입니다.
이종근 시인(필자)의 시 「삼판서 고택」은 바로 이 역사적 공간을 배경으로, 조선 건국의 핵심 사상과 현대인의 윤리적 물음을 절묘하게 교차시키며 독자에게 묵직한 울림과 감상을 기행시로 선사합니다.
이제 영주 <삼판서 고택>의 역사 안으로 들어가, 필자의 시와 함께 시대정신과 선비의 혼을 마주하는 시간을 가져보려 합니다.
■ 영주 삼판서 고택은 새로운 시대를 설계한 이념의 요람이다.영주 시내 구학공원과 서천 사이 즉 경북 영주시 선비로 181번길 56-1에 자리한 <삼판서 고택>은 그 이름처럼 세 명의 판서가 대를 이어 살았던 유서 깊은 장소입니다. '
▲이종근 시인(필자)
ㅁ자형' 전통 한옥 구조로 지어진 이 고택은, 당시 선비들의 주거 문화와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 중요한 건축적 가치를 지닙니다. 본래는 영주 향교 부근에 있었으나, 1961년 영주 대홍수로 인해 소실된 아픔을 겪었습니다.
그러나 훼손된 역사적 가치를 복원하려는 지역 사회의 끈질긴 노력으로 2008년 현재 위치에 복원되어, 과거와 현재를 잇는 문화유산이자 영주의 자랑스러운 관광 명소로 다시 태어났습니다. <삼판서 고택>은 특히 조선 개국공신 삼봉 정도전(鄭道傳)과 깊은 인연을 맺고 있습니다.
고택의 첫 주인은 바로 정도전의 아버지인 정운경(鄭云敬) 공입니다.
고려 말 형부상서를 지낸 그는 평생을 청렴결백한 '염의(廉義) 선생'으로 불리며 올곧은 삶을 살았습니다.
정운경 공의 사위인 황유정(黃有定)은 한성부판윤 등 판서급 요직을 두루 거치며 가문의 명예를 이어받았습니다.
이어 황유정 공의 외손자인 김담(金淡)은 세종대왕의 명으로 역법과 천문 연구에 크게 이바지하며 『칠정산내편』 등을 편찬한 조선 전기 최고의 과학자이자 문신으로, 이조판서직에 오르며 '삼판서'의 마지막으로 장식했습니다. 이처럼 <삼판서 고택>은 단순한 주거 공간이 아닌, 조선 초기 최고의 지성과 행정을 담당했던 인물들이 대를 이어 살아온 '이념과 철학의 요람'이었던 셈입니다.
이들의 삶의 궤적은 곧 영주 지역의 선비 정신과 깊은 유학적 전통을 상징하며, 오늘날 '선비의 고장'으로 불리는 영주의 역사적 바탕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리고 정도전의 역작 《조선경국전(朝鮮經國典)》은 조선 태조 3년인 1394년에 그가 총 2권으로 편찬한 최초의 사찬 법전입니다.
대한민국 보물 제1924호로 지정되어 원간본이 지금은 수원화성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여기 나온 법전의 한 구절을 인용하여, 필자의 시 「삼판서 고택」을 시작합니다.앞서 『조선경국전』은 조선 건국의 핵심 인물이자 <삼판서 고택>의 첫 주인이었던 정운경의 아들 정도전이 새로운 왕조의 통치 이념과 제도를 집대성한 역작이라 했습니다.
특히 시에 인용된 구절은 단순히 '신하의 도리'를 넘어, 진정한 통치자인 임금과 보좌하는 신하 간의 이상적인 관계, 즉 권력의 본질과 윤리적 책무에 대한 깊은 철학을 담고 있습니다.
임금의 잘못을 비판하고 옳은 것을 주장할 줄 아는 신하의 용기를 강조하는 대목은, 지식인이 지녀야 할 시대정신과 준엄한 비판 의식을 오늘날에도 강렬한 메시지로 남아 있습니다.
필자는 이를 통해 독자에게 시대를 초월한 윤리적·철학적 질문을 던지며, 단순한 옛집의 이야기가 아님을 선언합니다.삼판서 고택이종근 “임금이 신하만 못하면 임금은 신하에게 전권을 맡기는 것이 좋다. 임금이 그르다고 해도 신하는 옳다고 말하고, 임금이 옳다고 해도 신하는 그르다고 말한다."―《조선경국전》 영주역에서 발을 옮겨<삼판서 고택> 찾아들며 서천을 바라본다물을 따라가면 발이 먼저 젖고 말을 타고 오르면 몸이 먼저 결박된다 강 근방에서 벼락처럼 쩌렁거리는 물소리를 훔치면서도 해진 바랑을 짊어진 나는 말 울음소리 질겅거리는 편자를 갈아 끼워 소백산을 저벅저벅 넘어간다목이 서늘해지는 자리에 한 줄의 말을 걸어 두었더니 궁궐 안에서는 그 말이 밤사이 서리가 내려 금이 갔다
신(臣)이란 무언가
어디쯤이 사람의 뼈가 될까
내게 달린 이 명패가 사람의 등을 바로 곧추 세울 수 있을까발길을 쫓던 그림자가 순간, 앞서 가 있고 남겨진 발자국은 밤의 멍에 나는 다시 길 아닌 길을 고른다
■ '신(臣)의 도리'와 '길 아닌 길'을 시로 묻는다. 화자는 '영주역'에서 출발해 '삼판서 고택'으로 향하는 여정을 통해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자기 성찰의 깊이를 더합니다."물을 따라가면 발이 먼저 젖고 / 말을 타고 오르면 몸이 먼저 결박된다"라는 구절은 어떤 삶의 방식을 택하든 책임과 제약이 따르는 인간 존재의 숙명을 은유합니다.
'해진 바랑'과 '질겅거리는 편자' 속에서도 '소백산'을 넘어가는 화자의 모습은, 고단한 현실 속에서 신념을 지키려는 굳건한 결기가 엿보이는 대목입니다.
"목이 서늘해지는 자리에 / 한 줄의 말을 걸어 두었더니 / 궁궐 안에서는 그 말이 / 밤사이 서리가 내려 금이 갔다"라는 시구는, 진실한 조언이나 이상적인 발언이 권력의 현실 앞에서 얼마나 쉽게 훼손될 수 있는지를 날카롭게 지적합니다.
이는 오늘날 우리 사회의 소통 부재와 불의에 대한 화자의 날카로운 비판 의식과 궤를 같이합니다.여기에서 시의 핵심은 "신(臣)이란 무언가"와 “내게 달린 이 명패가 / 사람의 등을 바로 곧추 세울 수 있을까"라는 직접적인 질문입니다.
'신(臣)'이라는 명패는 고대·중세 관료뿐 아니라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부여되는 사회적 역할, 직책, 심지어 '국민'으로서의 정체성을 상징합니다.
이 '명패'가 과연‘등을 바로 곧추세울' 수 있도록 하는 힘인지, 아니면 순응과 굴복을 강요하는 족쇄인지에 대한 깊은 존재론적 성찰을 요구합니다. 종국에는 "발길을 쫓던 그림자가 / 순간, 앞서 가 있고 / 남겨진 발자국은 밤의 멍에"처럼 고독하고 힘든 길임을 알면서도, 화자는 "나는 다시 길 아닌 길을 고른다"라고 단언합니다.
이는 획일적인 기준이나 주류의 흐름에 휩쓸리지 않고, 자신의 양심과 신념에 따라 '새로운 길', 즉 '진실하고 올바른 길'을 선택하겠다는 화자의 굳건한 결기를 보여줍니다.
이는 현대적 관점의 우리 사회에서 개인의 주체적인 선택과 윤리적 용기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역설하는 메시지입니다.■ 영주를 넘어 시대에 던지는 물음이 역사적 가치이자 문학사적 의의를 지닌다. 필자의 시 「삼판서 고택」은 영주라는 구체적인 지역의 역사와 문화를 재발견하고, 이를 시대를 관통하는 보편적 주제로 승화시킨 점에서 나름 그 가치와 의의를 지닙니다.우선은 지역 문화의 재해석입니다.
삼판서 고택과 정도전의 『조선경국전』이라는 영주의 역사적 자산을 단순히 소개하는 것을 넘어, 현대적인 시각과 문학적 상상력으로 재해석하여 독자에게 새로운 가치를 부여합니다.
이는 정체한 지역 문학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하며 지역민의 자긍심을 고취하는 데 이바지합니다.두 번째는 고전의 현대적 소환입니다.
시는 『조선경국전』이라는 고전을 중요한 모티프로 활용하여, 선비들의 고뇌와 통치 철학을 현대적 맥락에서 되살립니다.
이를 통해 고전의 가치를 재확인하고, 과거의 지혜가 오늘날에도 유효한 통찰로 제공함을 가감 없이 보여줍니다. 세 번째는 깊이 있는 철학적 사유입니다.
필자는 '권력과 진실', '개인의 정체성과 사회적 책임', '정의를 향한 고독한 선택' 등 인간 존재의 본질적인 질문들을 깊이 있게 다룹니다.
감각적이고 압축적인 언어, 상징적인 시어(詩語) 사용은 독자가 시의 의미를 능동적으로 탐구하게 만듭니다. 끝으로 시대정신과의 조응입니다.
사회 비판적 시각과 진실을 갈망하는 필자의 철학적 성향이 이 시에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이 시는 불확실한 시대 속에서 우리 사회가 추구해야 할 가치와 개개인의 윤리적 선택에 대한 묵직한 화두를 던지며, 오늘날 우리 사회가 직면한 다양한 문제에 대한 성찰을 유도합니다. 필자의 시 「삼판서 고택」은 영주의 자랑스러운 역사적 공간과 유산이 문학 즉 시를 통해 어떻게 생생하게 오늘날 우리에게 말을 걸어올 수 있는지를 보여준 계기였습니다.
이번 기행에서 얻은 시 한 편을 통해 지금 우리가 발 딛고 선 영주 땅의 역사적 숨결을 다시금 느끼고, 더 나아가 각자의 삶 속에서 '길 아닌 길'을 선택하는 용기 있는 걸음에 대해 깊이 성찰해 보는 소중한 시간으로 계속 이어지기를 바랍니다. ■ 이종근 시인은 중앙대학교 예술대학원 문예창작전문가과정 수료 및 중앙대학교(행정학석사)을 마침.『미네르바』및『예술세계(한국예총)』신인상으로 등단함.『서울시(詩)-모두의시집(한국시인협회)』,『문예바다공모시당선작품(제1집)』,『수원시민창작시공모(수원문화재단)』,『부마항쟁문학제걸개시화전』,『서초골목이야기4(서울서초문화원)』,『소금과시·시인선188;테마시"물"』등에 참여함.《서귀포문학작품상》,《박종철문학상》,《부마민주문학상》,《도산안창호글짓기공모》,《고려정당문학문열공매운당이조년선생추모전국백일장작품공모(고령문화원)》,《경상북도문예현상공모전》등에서 수상함.「충남문화관광재단문학예술지원금」등을 수혜함. 시집『광대, 청바지를 입다』,『도레미파솔라시도』등이 있음.
삼판서 고택 이종근 onekorea2001@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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