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지방보훈청, 12월의 우리고장 독립운동가 선정 ‘신채호 선생’
홍대인 | 기사입력 2018-12-03 23:34:11
[대전타임뉴스=홍대인 기자] 대전지방보훈청(청장 강윤진)은 청소년 및 시민에게 애국선열의 위국·헌신정신을 알리고 보훈정신 함양에 기여하고자 ‘12월 우리고장 독립운동가’로 단재 신채호 선생을 선정한다고 밝혔다.

단재 신채호 선생은 1898년에 성균관에 입교했다가, 독립협회(獨立協會)에 가입했으며, 만민공동회 운동 때에는 간부급으로 적극적 활동을 전개하였다. 독립협회 해산 후에는 향리에 돌아와 문동학원(文東學院) 등에서 신교육에 종사하였다. 1905년에는 『황성신문(皇城新聞)』의 논설기자가 되어 활동하였다. 『황성신문』이 무기 정간되자,『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의 논설기자로 자리를 옮기었다. 이 신문에서 자유롭게 필봉을 휘둘러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과 친일파의 매국행위를 통렬하게 비판하고 국권회복에 온 국민이 성력을 다할 것을 계몽하였다.

1907년 4월에 국권회복운동의 비밀 결사로서 신민회(新民會)가 창건되자 이에 가입하여 그 주요회원으로 활동하였다. 신채호는 신민회의 이념과 목표를 그의 논설 속에 충실하게 반영하여 국민을 계몽했으며, 신민회의 대변인과 같은 역할을 수행하였다. 또한 그는 주시경(周時經)과 함께 국문 전용의 여성잡지인 『가영잡지』의 편집인이 되어 부인층의 계몽에도 노력하였다.

또한 애국계몽운동기의 『독사신론』(1908), 『을지문덕(乙支文德)』(1908), 등을 저술하여 근대민족사학을 수립하는 위대한 업적을 이룩하였다. 그는 격렬한 필치로 한편으로는 존화주의에 젖은 중세사학을 비판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일제의 초기 식민주의사관의 거짓 학설에 학문적 투쟁을 전개하면서 새로운 근대민족주의사관에 의하여 한국 역사를 새로이 체계화하는 저서들을 저술하였다.

1911년 12월에는 블라디보스톡에서 『권업신문(勸業新聞)』의 주필로 활동하였다. 또한 1912년 광복회(光復會)를 조직하여 그 부회장을 맡아 활동하였다. 또한 1914년에 동창학교(東昌學校)에서 청소년들에게 국사교육을 시키는 한편 《조선사(朝鮮史)》(失傅)을 저술하였다. 이 시기에 만주 일대의 고구려 유적을 답사하여 그의 민족사학의 실증적 토대를 더욱 발전시키고 북경에 이주하여 국사연구와 문필활동에 종사하였다.

1919년 3 1운동이 일어나자, 1919년 4월 10일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수립을 위한 최초의 29인의 모임(임시정부 발기회의)에 참가하였다. 제2회 의정원회의에서 의정원의원으로 선출되었으며, 제5회 의정원회의에서는 전원위원회(全員委員會) 위원장과 충청도 위원에 선출되었다.

1919년 10월에 상해에서 『신대한(新大韓)』지를 발행하여 무장투쟁노선을 지지하는 언론활동을 했으며, 1923년 1월에는 의열단의 요청을 받고 의열단의 독립운동노선과 투쟁방법을 천명하는 유명한 「조선혁명선언(朝鮮革命宣言)」을 집필하였다. 1923년 1월에 상해에서 국민대표회의(國民代表會議)가 개최되자, 창조파에 가담하여 상해 임시정부를 해체하고 새로운 임시정부의 수립을 주장하였다. 국민대표회의가 실패로 끝나자 크게 실망하여 칩거하면서 국사연구에 종사하였다. 이 시기에 『조선상고문화사(朝鮮上古文化史)』, 『조선사연구초(朝鮮史硏究艸)』에 실린 논문들을 집필하여 근대민족사학을 확립하는데 박차를 가하였다. 이후 점차 무정부주의 독립운동에 관심을 갖고 1928년 4월에는 그 스스로 무정부주의 동방연맹 북경회의를 개최했다. 이 회의 결의에 따라 독립운동자금을 염출하려다 일제관헌에 체포되어 10년형의 선고를 받고 복역 중 1936년 여순감옥에서 옥사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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