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효공 황자룡 선생”헌다례 행사
| 기사입력 2010-05-05 09:45:50

원주문화원(원장 강태연)은 “충효공 황자룡 선생”을 추모하기 위하여 2010년 5월 6일(목) 오전 10시 30분에 충효사(문막읍 반계리)에서 시민, 황자룡 선생 후손 등 15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헌다례를 개최한다.



헌다례는 식전행사로 전통무용, 민요공연이 진행되며, 다례봉행으로 초헌례는 원주문화원장이 아헌례는 원주시의회의장, 종헌례는 창원황씨 종친회장이 진행한다.



참고자료 : 황자룡(黃子龍, 1568-1652) 선생 약력



선생의 본관은 창원(昌原)으로, 아버지 황징(黃澄)과 어머니 원주이씨 사이에서 1568년 음력 3월 23일 태어났고, 무진년(戊辰年)에 태어났다고 하여 초명(初名)을 무진(戊辰)이라고 하였다.



타고난 품성이 어질어서 정성을 다하여 부모를 섬겼고 기골이 장대하였다. 임진왜란 때 군문(軍門)에 들어가 왜적의 장수를 사로잡은 공이 있어 황장사(黃壯士)로 불려졌고, 이러한 공으로 원주목사(原州牧使) 한준겸 (韓浚謙)에 의해 병방(兵房)으로 발탁되었다.



효성이 지극하여 50리 길을 매일 어버이께 장국밥을 봉양하였고, 100 일째부터는 호랑이가 그를 태우고 다녔으니 사람들이 이러한 사실을 알고서 “하늘이 낸 효자”라고 칭송하였다. 1608년 선조(宣祖)가 승하 하시니 부모의 상사(喪事)와 같이 삼년상(三年喪)을 입었고, 이원익(李元翼)․임숙영(任叔英) ․ 김세렴(金世濂) 등이 이러한 충의(忠義)를 찬양하였다.

1610년 아버지의 병환이 위독해지자 손가락을 깨물어 피를 내어 드렸고 5년을 더 살다가 돌아가자 묘소 옆에 여막(廬幕)을 짓고 살아 있을 때와 같이 섬겼다고 한다. 한준겸이 크게 감탄하여 시를 지어 읊으니 김상용 (金尙容) ․ 김창일(金昌一) ․ 이식(李植)이 차례로 선생의 효행을 화답 하였고, 이로부터 명현(名賢)들이 지위의 고하(高下)를 가리지 않고 교유 하였다.



1627년 이인거(李仁居)의 난이 일어나자 역적과 친하다 하여 원주목사 홍보에게 잡혀 서울로 압송되는 도중에 그의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간 의병장 김창일과 참모 허후(許厚)의 도움으로 풀려나 장사지냈다. 1634년 정문(旌門)이 세워지고, 1635년 중국 황제에게 알려져 소련(少連) ․ 대련(大連) ․ 황향(黃香)과 함께 사효(四孝)라 하여 ‘이련 (二連) ․ 이황(二黃)’이라는 말이 나오게 되었다.



1650년 효종(孝宗)은 황효자의 이름을 자룡(子龍)이라 지어주고 절충장군(折衝將軍) 용양위(龍驤衛) 부사과(副司果) 벼슬을 하사하였다.



1652년 음력 4월 22일 자녀와 친지가 지켜보는 가운데 돌아가니 향년 85세였다. 시호(諡號)를 충효(忠孝)라 내리고, 1653년 나라에서 다시 홍색 (紅色)의 정문(旌門)을 세우니 세상 사람들이 “살아서는 청정문(靑旌門) 이고, 죽어서는 홍정문(紅旌門)이다.”라고 하여 ‘생청사홍(生靑死紅)’이라고 칭송하였다.



황효자를 봉안한 충효사는 1704년에 건립되어 나라에서 ‘충효사(忠孝祠)’라는 현판(懸板)과 제기(祭器)를 하사하였다. 2009년 11월 11일자로 원주시 향토유적 제2009-3호로 지정되었다.

광역시 충청북도충청남도경상북도전라북도전라남도
서울타임뉴스인천타임뉴스대전타임뉴스대구타임뉴스광주타임뉴스울산타임뉴스부산타임뉴스제주타임뉴스세종타임뉴스태안타임뉴스안동타임뉴스의성타임뉴스군위타임뉴스영양타임뉴스울진타임뉴스문경타임뉴스상주타임뉴스예천타임뉴스영주타임뉴스청송타임뉴스경주타임뉴스영덕타임뉴스구미타임뉴스김천타임뉴스칠곡타임뉴스봉화타임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