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계 황준량 당시 상소문 세간 관심사
군민을 생각하는 목민관의 자세가 당시 단양군민 구제
이부윤 | 기사입력 2012-09-10 14:20:12
충북 단양군 단성면 성재산 기슭 충혼탑 광장에는 황준량 선정비가 자리하고 있는데 당시 황준량군수의 애절한 상소문이 세간에 관심이 되고 있다. /사진=단양군청


[단양=타임뉴스]충북 단양군 단성면 성재산 기슭 충혼탑 광장에는 황준량 선정비가 자리하고 있는데 금계 황준량은 명종 12년인 1557년에 단양군수로 부임한 뒤 고을의 피폐함을 알리는 상소를 올려 10년 동안 세금을 감면받게 함으로써 존망의 위기에 처해있던 고을을 구해냈다.

가혹한 세금과 탐관오리의 수탈로 당시 단양 고을에는 겨우 40호만 남아있었는데 세종대 235호와 비교하면 당시의 비참함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흔히 제갈량의 출사표를 읽고 눈물을 흘리지 않으면 충신이 아니라고 한 것처럼 황준량의 상소문을 읽고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면 가히 목민관이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우거진 잡초와 험한 바위 사이에 있는 마을 집들은 모두 나무껍질로 기와를 대신하고 띠풀을 엮어 벽을 삼았으며 농토는 본래 척박해서 수재와 한재가 제일 먼저 들기 때문에 사람들이 모두 흩어져 고정적인 재산을 가진 사람이 하나도 없습니다.”



“가혹하게 세금을 거둬들이는 것이 다른 고을 백성보다 몇 곱절이나 되어 한 집이 1백호의 부역을 부담하고 한 장정이 1백 사람의 임무를 감당하게 되어 가난한 자는 이미 곤궁해지고 곤궁한 자는 이미 병들어 아내와 자식을 데리고 사방으로 흩어져 갔습니다.”

“살을 에어내고 골수를 우려내듯 참혹한 형별을 가하여 잠시도 편안히 살 수가 없으므로 마침내 온 고을이 폐허가 되었으니, 성덕이 밝은 시대에 백성이 이렇게 심하게 학정에 시달릴 줄을 누가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그런데도 이렇게 비참한 상황을 만들어 놓은 관리는 끓는 물에 삶기는 형벌을 면하였으니 악을 징계하는 법이 너무 허술하지 않습니까?”

그러고 나서 고을을 살리는 세 가지 방도를 상책, 중책, 하책으로 나누어 소개했다.

고을을 항구적으로 살려내기 위해 10년 동안 부역을 면제하여 달라는 것이 상책이요, 만약 상책의 세금 면제가 안 되면 고을을 혁파해서 부곡(천민의 마을)으로 만들어 큰 고을에 속하도록 하라는 것이 중책이요, 마지막 재목, 종이, 산행(사냥), 야장, 악공, 보병, 기인, 피물, 이정, 약재 등의 세금을 감면하여 줄 것을 요청하는 것이 하책이다.

1557년 5월 17일, 상소가 있은 지 10일 후 대신들은 뜻을 모아 왕에게 아뢰었다.

“단양 군수 황준량의 상소에 상, 중, 하 세 가지 방책이 있었는데 하책에는 그 조목이 열 가지가 있었습니다. 진달한 상책에 따라 공부와 잡역을 10년 동안을 기한으로 모두 감면해서 소복시키는 것이 마땅합니다. 다른 잔폐한 고을도 장차 이를 본받아 공역을 면제 받으려는 데가 많을 것이나 단양은 백성의 호가 40에도 차지 않는다고 하니 팔도 가운데 어찌 이런 고을이 또 있겠습니까. 다른 고을은 들어주어서는 안 됩니다. 윤원형의 의논도 신들과 다르지 않으므로 동의하여 아룁니다.‘

이에 명종 임금은 아뢴 대로 하라고 전교함으로써 마침내 단양 고을이 전폐의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황준량은 힘든 백성을 위해 몸을 아끼지 않았으나 스스로에겐 한없이 엄격하여 늘 청빈한 삶을 살았다. 20여 년간 벼슬살이를 했는데도 그가 죽었을 때에는 염습에 쓸 천 한 조각이 없었고 널에 채울 옷가지조차 없었다고 한다.



그자 죽자 퇴계는 손수 제문을 짓고 행장을 써서 그의 죽음을 애도하였는데, “슬프다 하늘이 어찌 이 사람을 그렇게도 빼앗아 가는가. 참인가, 꿈인가, 슬프다, 금계여! 한번 가면 다시 오기 어렵나니, 끝이 났네! 끝이 났네! 슬프고 슬프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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