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지방보훈청, 10월의 우리지역 독립운동가 선정 ‘김복한 선생’
홍대인 | 기사입력 2018-10-01 19:33:19
[대전타임뉴스=홍대인 기자] 대전지방보훈청(청장 강윤진)은 청소년 및 시민에게 애국선열의 위국·헌신정신을 알리고 보훈정신 함양에 기여하고자『이달의 우리지역 독립운동가』로 ‘김복한’ 선생을 선정한다고 밝혔다.

김복한(金福漢, 1860~1924)선생은 1892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뒤 홍문관교리, 이듬해에는 사서(司書)에 제수되었으며 성균관대사성·형조참의를 역임하였고, 1894년에는 승정원승지에 제수되었다. 그러나 그 해 6월에 갑오경장이 시작되자, 기울어져가는 국운을 한탄하며 벼슬을 버리고 고향에 돌아가 자정(自靖)하기로 결심하였다. 이듬해 8월에 명성황후가 시해되고 단발령이 내리자, 이설(李偰)·안병찬(安炳瓚) 등과 같이 홍주목사 이승우(李勝宇)에게 권유해 항일의병을 일으켰다. 그러나 이승우가 일제와 내통함으로써 일본군에게 잡혀 투옥되었다. 곧 고종의 특지로 석방되어 성균관장·중추원의관(中樞院議官)에 임명되었으나, 왜적과 역적들을 토벌하지 못했다 하여 사퇴하고 후진 양성에 몰두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 체결되자 이설과 함께 이지용(李址鎔)·박제순(朴齊純)·이완용(李完用) 등 5적의 참수를 간청하는 소를 올리다가 투옥되었으며, 1906년에는 민종식(閔宗植)과 홍주에서 다시 의병을 일으켜 일본군과 싸우다가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1907년에도 의병 은닉과 민심 선동 등의 혐의로 체포되어 공주로 압송되는 도중에 일본순검에게 무수히 구타당하고 어렵게 목숨을 건졌으나, 그 후유증으로 평생 식사와 용변을 다른 사람에게 의지하게 되었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문인 박경호(朴敬鎬)를 상경시켜 유림대표들과 협의하게 하였고, 영남의 곽종석(郭鍾錫)과 함께 호서 유림을 대표해 전국 유림 137명의 서명을 받아 파리강화회의에 독립청원서인 파리장서(巴里長書)를 발송하였다. 뒤에 발각되어 모두 일본경찰에 붙잡혔는데, 옥중에서 중병으로 90여일 만에 석방되었다. 1921년부터는 인지사(仁智社)를 세워 후진 양성에 온 힘을 기울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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