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국은 당신의 희생을 결코 잊지 않을 것”
낙동강 전선 유해발굴 현장과 격전지를 찾아서
| 기사입력 2010-06-21 13:35:40

사라질 뻔한 대한민국이 살아날 수 있었던 버팀목. 6.25 전쟁 당시 최대 격전지였던 낙동강 지역을 말할 때 빠지지 않는 말이다.

이곳은 전쟁 60년이 지났지만 전쟁의 흔적이 여전하다.



고지에서는 전사자의 유해가 매일 발굴되고, 6.25 이후 현재까지도 미군의 군수기지(Camp Carrol)가 위치해, 한미연합전력의 중요한 축을 담당하고 있다.

6.25를 일주일여 앞두고 60년이 지난 지금도 전쟁의 흔적이 생생한 경북 지역을 찾았다.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 이형심 팀장(상사)의 명령에, 땅을 파던 팀원들이 일제히 삽을 내렸다.



땅을 판지 2시간 만에 찾은 유골이다.



섭씨 30도를 오르내리는 무더위에 팀원들의 옷은 땀 범벅이 된지 오래다.


지난 16일, 경북 군위군 노행리의 한 고지. 해발 800m가 넘는 이 지역은 6.25 당시 남하하는 북한군과 이를 막으려는 국군 사이에 치열한 교전이 벌어졌던 곳이다.



이용곽 육군 제2작전사령부 유해발굴통제장교(소령)는 “1950년 8월 초, 이곳과 신령(경북 영천시 신령면), 다부동(경북 칠곡군 가산면 다부리) 지역에서 치열한 전투가 있었다”며 “이 유해도 그때 전사한 분의 것으로 추정된다”고 말했다.



이 팀장의 손짓에 따라 팀원들이 삽 대신 방향을 나눠 정교한 호미질에 들어갔다.



황토와 나무뿌리가 섞여 육안으로는 유골과 나무뿌리를 구분하기 힘들었지만 팀원들은 능숙한 솜씨로 흙을 발라가며, 유골과 뿌리를 분리해, 유골을 수습해 나갔다.





그러기를 1시간 여. 사람 모양이 그려진 유골수습판에 머리, 팔, 다리 등 부위별로 유골이 모두 채워졌다.



이어 박한솔 상병이 유골을 하나하나 한지로 정성껏 포장했다. 함께 발굴한 탄피와 군화도 한지에 쌌다.


유골을 한지에 수습하는 것은 우리 장례의식을 따르는 것이다.



이 팀장은 “우리 작전은 전투 중이라 장례도 치르지 못한채 죽음을 맞은 전사자분들의 넋을 달래는 일이 중요하다”면서 “모든 작전 절차가 장례 절차에 맞춰 진행된다”고 설명했다.



유골의 한지 포장이 끝나자, 준비한 유골함에 포장한 유골을 넣은 뒤 태극기로 유골함을 싸고, 제례절차가 진행될 주변 너른 터로 유골함을 옮겼다.


유골함을 옮기는 작업은 전사자의 예우에 맞춰 A급 전투복장에 장례용 목티, 장갑, 마스크를 쓴 병사가 담당한다.



잠시 후 너른 터에는 이날 발굴된 유골함 2개가 나란히 놓여 향이 피워지고, 막걸리, 명태포 등의 간단한 상이 차려지며 전사자의 명복을 비는 제례 의식이 시작됐다.


제례의식이 끝나자 유골함은 전사자를 떠나보내는 부대 의식과 마찬가지로 장병의 도열 속에 봉안소로 옮겨졌다.



유해발굴작전은 유해지점 포착→발굴→제례의 3단계로 진행된다.



2007년 창설된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은 전국에 8개 팀 1000여 명(지원병력포함)의 단원들이 무더위에 아랑곳하지 않고 유해를 발굴 중이다.



감식단의 1개 팀은 8명 안팎의 분대 규모로, 수는 적지만 활약상은 일당 백이다.



팀장과 팀원 모두 발굴, 감식 분야의 전문가다.



경북지역 발굴을 맡은 이형심 상사 부대만 해도, 백빈(병장), 박한솔 신상백(상병) 등이 모두 대학에서 고고학 또는 발굴학을 전공하고, 감식단에 지원한 지원병이다.



6.25 당시 격전지가 대부분 산악 고지인 탓에 단원들은 주먹밥으로 끼니를 해결하며 매일 심산준령을 오가면서도 전문가급의 지식과 숙련된 솜씨로 이 지역에서만 벌써 50구가 넘는 유해를 발굴했다고 한다.



박 상병은 “고되고 쉽지 않은 일이지만 이분들의 명예를 찾는 일에 자부심을 느낀다”고 말했다.



이 팀장도 “내 자식이 군에서 이런 고생을 한다는 것을 알면 부모님들도 좋아하시지 않을 것”이라면서도 “유해 한구 한구를 찾을 때마다 힘들다는 생각보다는 나라를 위해 목숨바친 분들의 고마움과 해냈다는 성취감의 매력이 크다”고 말했다.


유해발굴감식단 장병의 이런 노력 속에 감식단은 올해만 총 727구의 유해를 발굴하는 등 현재까지 4900여 구(아군 4100구)의 유해를 발굴했다.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 유영승 공보장교(소령)는 “열악한 여건에서도 장병의 노력 속에 사업이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다”며 “적진(북한)에 까지 가서 유해를 찾아 오는 미국처럼 나라를 위해 희생한 분들을 기리는 숭고한 사업을 지속할 것”이라고 말했다.



대구광역시에서 북쪽으로 30여 분을 가면 경북 상주(25번 국도)와 안동(5번 국도), 왜관 및 구미(지방도 908번)으로 가는 길이 갈라지는 곳에 다부동전적기념관이 자리하고 있다.



다부동 기념관은 오늘의 대한민국을 있게 한 호국선열의 넋을 기리고, 그들의 호국정신을 본받기 위해 1981년 세워졌다.

기념관이 세워지게 된 계기도 특별한데, 당시 농민대표로 청와대의 대통령초청간담회에 참석했던 정순덕(65) 씨가 “우리 동네는 6.25 격전지인데, 나라를 위해 목숨바친 분들을 위한 기념관이라도 세워달라”고 말한 뒤 공사가 시작됐다고 한다.



6.25를 일주일여 앞둔 17일에도 이곳에는 인근 유치원 어린이들의 견학이 이어졌다.



기념관 관리를 담당하는 한국자유총연맹 경북지부 허위범 부장은 “매년 90만 명 이상이 다부동 기념관을 다녀간다”고 말했다.


6.25 당시 경북 지역은 대구를 확보하려는 북한군과 이를 지연시키려는 아군이 치열하게 맞붙였던 격전지였다.



당초 8월 께 전쟁을 끝내려던 북한군은 낙동강 전선에 주력부대를 총동원해 돌파구 확보에 나섰고, 아군은 UN군의 도움을 받아 인민군의 공세를 지연시키고, 9월 대반격의 시간을 벌어야 했다.



8월 5일 낙동강을 도하한 북한군은 13, 3, 1, 15사단으로 편성된 2만1000명의 병력이 대구를 뺏기 위해 총공격에 나섰고, 국군 1사단과 미군 27연대는 경북 칠곡군 가산면 다부동에서 8200명의 병력으로 적에 맞섰다.



다부동은 대구로 통하는 국도와 지방도가 만나는 요충지인데다,



마을을 중심으로 유학산(해발 839m), 가산(해발 902m)이 둘러싸고 있어, 방어에 유리한 지형을 갖췄다.

아군으로서는 다부동이 적의 수중에 들어가면 대구가 곧바로 적의 사정권에 들어가기 때문에, 대구 방어를 위해 반드시 지켜야 하는 전략 지역이었다.

백척간두의 위기에 처한 국군은 숫적으로 열세였지만, “내가 돌아서면 나에게 총을 쏘고, 너희들이 돌아서면 내가 총을 쏘겠다”는 백선엽 1사단장의 독려에 힘입어, 세 배가 넘는 북한군을 막아냈고, 전투는 55일간 이어졌다.



고지의 주인이 수십차례 바뀌는 접전 속에 아군 8700 명, 적군 1만7500명이 죽거나 다쳤다.

전적기념관이 세워진 뒤, 1994년 전사자 유해발굴이 처음 시작됐는데, 지난해까지 매년 50여 구의 유해가 발견됐다고 한다.



다부동 기념관의 김은정 칠곡군 문화관광해설사는 “마을 생존자들의 말씀에 따르면 다부동 전투에는 군인은 물론 민간인도 많이 희생됐다고 한다”며 “그래서인지 유학산 일대에 수많은 유해가 나왔고, 해마다 유골이 발견된다”고 말했다.


낙동강 전선에서 빼놓을 수 없는 전투가 왜관지구 전투다.



경북 왜관~달성군 현풍면 방어를 맡고 있는 미 제1기병사단(사단장 게이 소장)은 북한군의 낙동강 도하가 임박하자, 8월3일 왜관지역에 소개령을 내리고, 낙동강 인도교(사진)를 폭파했다.


왜관 지역은 낙동강 방어선의 핵심인 Y방어선(왜관~유학산~다부동)의 주방어지역으로 대구 점령을 위해 총공세를 펼치던 북한군의 낙동강 도하를 반드시 저지해야 하는 곳이었다.



전투는 미1기병사단의 방어에 유엔군 B-29폭격기 98대가 강 건너편 적 집결지(칠곡군 약목면, 구미시 인동동 일대)에 융단폭격을 퍼붓는 가운데, 북한군 T-34전차와 미군의 M-26전차의 최초 전차전이 벌어졌다.



유엔군의 융단폭격으로 후방보급선이 끊긴 북한군은 아군과 미군의 맹렬한 저항에 낙동강 돌파구 확보에 실패하고, 왜관 전투는 아군의 승리로 끝났다.



다부동을 비롯해 신령(경북 영천시 신령면), 안강(경북 경주시 안강읍), 왜관(칠곡군 왜관읍) 등 낙동강 전선의 주요 교두보에서 벼랑 끝에 몰린 국군은 유엔군의 지원과 놀라운 전투 의지로 북한군을 막아내고 반격의 시간을 벌 수 있었다.

다급해진 북한군은 주력 부대를 낙동강 전선에 밀어붙였고, 결과적으로 이는 경인권(서울-인천) 병력의 약화를 가져와, 인천상륙작전 성공에 기여하게 된다.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하자, 전세는 급속히 역전됐다.



공세였던 북한군은 수세로 몰렸고, 낙동강 전선도 급속히 붕괴됐다.



낙동강 전선의 놀라운 전투 성과가 사라질뻔한 대한민국을 살려낸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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