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북타임뉴스=이현석] 충북남부보훈지청(지청장 장숙남)은 ‘9월 우리고장 독립운동가’로 곽중규 선생을 선정했다.
곽중규 선생은 1891년 옥천에서 태어나, 1919년 3월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나자 옥천군 이원면에서 독립만세시위에 참가하여 활동하다가 일경에게 피체되어, 대전형무소에서 3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1924년 5월 상해교민회에서 설립한 인성학교의 교사로 재직하면서 교포 자녀들에게 민족사상을 고취시키는데 힘썼다. 1925년 3월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의원에 선임되어, 나창헌, 최석순, 강창제 등과 함께 임시대통령 이승만의 탄핵안을 제출하고, 나창헌을 심판위원장으로 한 탄핵심판위원회의 위원이 되어 탄핵안을 심리한 뒤 임시의정원에 보고하여 면직 처리케 하였다.
1927년 10월 상해 교민단의사회(僑民團議事會)의 선거에서 상해교민회 단장으로 선출되어 상해 교민들의 생활안정 등을 위해 활동하면서, 3·1절 기념식 등을 교민회 주최로 개최하여 교민 300여명에게 3·1정신을 앙양시키며 활동하다 1929년 8월 9일 사임하였다.
1929년 상해 프랑스 조계로 이사하여 성광사진관을 개업, 독립운동을 위한 연락장소로 제공하였다. 이어서 1931년 9월부터 윤봉길 선생을 사진관에 은신 기숙하게 하였으며, 동생 곽중선으로 하여금 윤봉길 선생에게 상해의 지리와 풍습을 알려주고 장차 거사를 대비케 하였다. 같은 해 11월에는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충청도 의원으로 선출되어 활동하였다.
1933년 4월 상해로 돌아와 한족유일독립당촉성회의 간부로 선출되어 활동하였으며, 또한 한국독립운동자동맹의 집행 위원에 선출되어 공산당과 제휴하면서 강소성 법남구지부에 가입하여 조직부장으로 활동하다가 상해 일본영사관 경찰에게 피체되어 신의주경찰서로 이송되었다. 같은 해 12월 신의주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2년 6월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뤘다. 1935년 5월 가출옥하여 천진에 있는 동생 곽중혁의 집에 머물러 있으면서, 동년 9월 상해의 가족들과 비밀연락을 취하던 동생 곽중선이 괴한의 총격으로 순국하였다는 비보를 듣게 되었다. 동생의 죽음에 애통해 하였으나 신변의 위험을 피하기 위하여 1938년 석가장으로 이주하여 계속 독립운동을 위해 활동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러 199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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